[리뷰]'너의 이름은.', 흔한 재료로 만들어 낸 훌륭한 칵테일

등록일 2017년01월11일 15시20분 트위터로 보내기


* 아래 리뷰 내용에는 '너의 이름은.'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휴대전화, 특히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세상은 바뀌었다. 그리고 그 바뀐 세상에서 대중들을 위한 작품과 상품도 변해야만 했다.

 

스릴러부터 로맨스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휴대 전화가 대중화된 초창기에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못 쓰게 할지 각본을 짜는 것부터 골몰해야 했다는 업계의 볼멘소리가 나오곤 했다. 배터리가 방전되거나 아예 휴대 전화가 나오기 전 시대를 무대로 하거나 장르에 따라서는 전파가 차단된 패닉룸을 무대로 한 영화도 있었다.

 

로맨스 드라마의 경우 특히 문제였다. 이 장르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간을 무대로 하는 경우가 많아 작품속에서 전화 한 번, 톡 한 번이면 쉽게 해결될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것에 관객이 민감하게 반응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2016년 8월 일본에 개봉한 후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2017년 1월 한국에서도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너의 이름은.'은 이 스마트폰이라는 소재를 로맨스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서로 몸이 바뀐 타키와 미츠하가 큰탈없이 일상생활을 수행하는데 있어 관객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데에는 스마트폰의 역할이 컸다. 친구들과의 톡으로 인간관계를 유추하고 알바 시간은 스케쥴러가 알려준다. 몸이 바뀐 동안 있었던 일들은 그간 찍은 사진들과 스마트폰 일기장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뒤바뀐 채로도 서로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점, 그리고 이것이 관객에게 설득이 된 점은 펜과 종이 밖에 없는 세상에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타키가 폐허가 된 이토모리 마을을 찾아가는데 성공한 것은 건축을 지망한 그림 실력과 라멘가게에서의 우연도 있었지만, 이승과 저세상을 가르는 사당에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스마트폰의 GPS와 지도 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0대를 주인공으로 스마트폰 없이 같은 수준의 설득력을 갖춘 각본을 쓰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기연과 우연이 쏟아졌어야 할지 생각해보면 머리가 아프다. 그 상황이었다면 타키에겐 입시를 위한 국토대장정 마니아라는 설정이 붙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계를 모두 극복한 것은 아니다. 몸이 바뀌었든 안 바뀌었든 그렇게 매번 스마트폰을 보면서 서로가 사는 정확한 날짜를 모른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처음엔 꿈인가 생신가 싶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서로의 번호를 이미 알고 있으니 얼마든지 전화해서 확인해볼 수 있는데도 확인 전화를 거는 장면이 뒤늦게 등장하는 건 애매한 측면이 있다. 먼저 서로 메일 주소만 주고받는다는 일본 전화 예절 탓인가 싶다가도 서로의 돈도 마음대로 쓰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전화 예절만 지킨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기억과 기록은 또 왜 그린 편리하게 선택적으로 지워져 가는지...

 

그런데 신경쓰이기 시작하면 치명적인 요소들이 막상 이 영화를 볼 때는 생각보다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SF판타지적인 설정보다 로맨스 드라마로서 감정의 흐름을 더 중요시한 영화이기도 하고 거슬릴 법한 포인트마다 관객의 시선을 요령있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요령은 바로 '너의 이름은.'의 음악과 노래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초창기 작품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별의 목소리'에서도 1인 자주 제작이라기엔 높은 영상 퀄리티와 함께 텐몬의 음악이 주목받았고, '초속 5cm'에 쓰인 주제가인 야마자키 마사요시의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도 영상과의 앙상블로 10년만에 차트 재진입을 하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우리나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광고인 '크로스로드'를 비롯해 BGM과 대사가 어우러진 CM영상도 작품 사이에 여럿 제작한 바 있다. 생각해보면 니혼팔콤의 전설인 '이스 2 이터널' 오프닝 제작에 손을 댄 것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활동에서 '너의 이름은.'에서 음악과의 시너지가 폭발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일본 밴드이지만 영국 어학 유학 당시 만난 한국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는 'RADWIMPS'의 노래가 이 영화의 감정선과 리듬감을 견인했다. 서로 몸이 바뀐 타키와 미츠하의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뮤직비디오와 같은 몽타쥬 화면에 노랫말로 실어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좋은 노래는 강한 힘을 갖고 있어 영상을 방해하는 수준만 아니라면 관객은 그 감정선에 쉽게 납득하기 마련인데, '너의 이름은.'은 영상까지 뛰어나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이 감정선과 리듬감에 취하다 보면 관객들은 앞서 말한 설정의 모순에 미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쉽게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작품의 O.S.T를 위해 RADWIMPS 전 멤버가 작곡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노래뿐 아니라 배경음악들도 상당히 섬세하게 쓰였다. 예를 들어 O.S.T 중 '미츠하의 테마'를 기본으로 한 '데이트'의 건반 선율은 극중 중요한 장면을 묘사하는데 쓰였다. 타키가 노스텔지어 사진전에서 히다의 이토모리 호수를 보게 된 그 순간에는 처음 보는 사진인데도 향수어린 색소폰음이 스쳐지나간다. 클라이막스 직후 혜성이 낙하한 8년 뒤 세상에서 쓰인 '데이트2'는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살아있다는 뉴스가 나오기 이전부터 같은 건반 선율이 한음씩 음이탈을 하기 시작한다. 이 세계가 대참사가 있었던 원래의 시간대에서, 타키가 소망한 미츠하가 살아있는 시간대로 이탈했음을 예고한 것이다.

 


 

음악이 장면과 일체화되어 영상의 리듬과 백그라운드 스토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고전기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흔히 말하는 유사 뮤지컬이나 최근 우리나라에서 흥행한 '비긴 어게인'이나 '싱 스트리트' 같은 음악 영화에 가까운 면도 있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영화 내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영화의 캐릭터 사이에 흐르는 정서와 분위기를 말로 풀이해 관객에게 전한다는 면에서 RADWIMPS의 노랫말은 고전 영화의 변사 같은 역할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 노래들과 함께 이야기를 빛나게 만든 것은 신카이 마코토의 여전한 장기인 아름다운 영상이다. 하늘의 햋빛과 별빛, 혜성의 오로라, 자고 일어난 이불에서 피어나는 먼지마저 반짝이는 빛의 입자들과 이를 담아낸 투명한 공기 같은 분위기 묘사까지 재앙마저 아름답게 보이게 만든다.

 

신카이 마코토는 '언어의 정원'을 비롯한 전작들에서 선보였던 이런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해냈다. 여기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해산을 계기로 합류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의 작화 감독 안도 마사시, 크로스로드에서 이미 함께 일한 바 있는 '토라도라',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캐릭터 디자이너 다나카 마사요시 등 베테랑들의 참여가 영상 퀄리티의 극대화를 실현 가능케 했다.

 

동시에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의 단점을 최소화하고 회피해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전까지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별의 목소리', '초속 5cm' 등 단편에서는 반짝이는 센스를 보이며 평단의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별을 쫓는 아이' 등 장편은 흥행과 평단의 평가 모두 좋지 못했다. 센스는 있지만 각본 구성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그 우려를 불식시키고 이번 장편인 '너의 이름은.'에서는 대중에게 어필하는 좋은 각본을 만들어내었다. 이번 작품의 만듦새를 보고 있자면 그동안의 장편 부진은 스텝업의 추진력을 얻기 위한 연습이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이야기로서만 따진다면 상당히 많은 레퍼런스를 참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혹은 살아오면서 받아들인 수많은 이야기들의 에센스를 자신 안에서 정제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의 이름은.'을 보고 있으면 정말 많은 작품들이 떠오기 때문이다.

 

극 초반에 시간대를 뒤튼 편집으로 주인공에게 벌어진 일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당시 상황을 잊지 않기 위해 자기 몸에 글을 써두는 것은 '메멘토', 극 후반 미래에 닥쳐올 재앙을 말하지만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 무녀라는 점은 '카산드라', 다른 세계(장소)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시간대였다는 점은 '혹성탈출', '창세기전', 과거와 미래의 남녀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점에선 '프리퀀시', '동감', 타임 슬립을 대를 이어 겪게 되는 면에서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시간대 개변을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이란 면에서는 '슈타인즈 게이트' 등등 작품들을 꼽다가 밤이 샐 지경이다.

 

가장 주요한 소재인 남녀가 몸이 바뀌어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작품으로는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조차 팬이어서 이름까지 빌려 쓴 '시크릿 가든'을 포함해 이루 셀 수도 없는 많은 작품들이 있다.

 


 

서로 몸이 바뀐다는 점은 로맨스 드라마에 있어 클리셰이면서 여전히 매력적인 요소이다. 타키가 책상을 발로 엎어 쑥덕대던 애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처럼 정작 자신이었을 때 못 했던 일들을 태연히 해내기도 하고, 때론 미츠하의 도쿄생활처럼 동경만 하던 꿈을 이루기도 한다.


연애가 그 사람을 자기처럼 느끼고 이해하며 서로의 일상에 서서히 스며들어 자연스러워지는 일이라고 한다면 타키와 미츠하가 겪은 일은 어쩌면 궁극의 연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쿠데라 선배와의 데이트 직전 두 사람이 꿈에서 깨고 자신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은 자기 상실감과 상대에 대한 상실감이 겹쳐진 탓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미츠하는 살아남았고 타키와 재회하게 되었지만 바뀐 세계에서도 이토모리 마을은 사라졌다.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이토모리 깡촌에서 살게 되겠지라고 자조하던 텟시도 결혼을 위해 도쿄로 나왔다. 어쩌면 혜성이 아니었더라도 이토모리 마을의 소멸은 시간문제였을지 모른다. 그 사라져갔을 마을을 생각하면 이장과 건설업자가 결탁하던 장면도, 어쩌면 나아가 타키와 미츠하가 벅차게 이루어낸 기적도 허무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두 세계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어떻게든 사람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과거 마유고로 대화재란 재앙으로 더 이상 의미도 알 수 없게 된 '무녀 입 술' 의식이 이어져 내려왔듯, 혜성으로부터 살아남은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은 세상 어디에선가 자신들의 삶과 인연을 이어나갈 것이다. 살아있으니까 가능한 무스비이다.

 

티어매트 혜성의 임팩트를 계기로 타키와 미츠하의 세계는 바뀌었다. 어쩌면 세카이계라는 조류를 만들어낸 '에반게리온'의 팬들이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를 보고 꿈꿔왔던 세카이계의 엔딩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너의 이름은.'이 3.11 대지진으로 상처받은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환상 속에서나마 위로했다는 의미를 이제는 우리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월호와 메르스를 겪으며 느낀 살리고 싶다,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은 그리 다르지 않을테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너의 이름은.'은 기존에 존재했던 재료들을 멋진 솜씨로 섞어 만들어낸 예쁜 칵테일 같은 작품이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 재료들의 백 스토리에 더 관심이 있을 수도 있고, 취향에 따라서는 스터가 너무 많았다거나 쉐이킹이 아쉬웠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이라면 술이 내포하고 있는 알콜 자체를 문제 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작품이 이렇게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공감하고 싶고, 적어도 기분 좋게 취하고 싶은 맛있고 예쁜 칵테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 본문의 내용은 게임포커스 리뷰어 Sion님이 기고하신 '너의 이름은.'의 리뷰를 가필 및 수정한 것으로, 게임포커스 편집부의 편집 방침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필자 프로필
닉네임 : Sion
영화, 서브컬쳐 칼럼니스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덕후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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