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국 신화 담은 TRPG '고려: 모험의 전당', 프랑스인 저자 올리안 레네와 만나다

등록일 2020년07월28일 10시15분 트위터로 보내기



 

"얼마 전까지도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은 1955년 전쟁 당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앞으로는 한국을 소재로 한 게임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가 한참 내리던 7월의 어느 날, 보드게임 카페에서 만난 '고려: 모험의 전당(The Koryo Hall of Adventures)'의 저자 올리안 레네(Aurelien Laine)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근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K-콘텐츠가 글로벌 전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유독 게임 중에서는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이 드문 상황. 국내에서도 '고스트 오브 쓰시마' 같은 작품이 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답했다.

 

올리안 레네는 AJP프로덕션의 대표이자 한국 신화를 기반으로 한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 '고려: 모험의 전당'의 저자이기도 하다. '고려: 모험의 전당'은 유명 TRPG '던전앤드래곤'의 공식 5판을 기반으로 한 독립적인 캠페인 세팅으로, 플레이어들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국 신화 속 전설적인 존재들과 만나고 자신 만의 모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AJP프로덕션 대표 및 작가 올리안 레네
 

'고려: 모험의 전당'은 해외에서 앞서 펀딩을 진행해 목표액의 두배 이상을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출시되었다. 해외에서의 호평에 힘 입어 현재는 텀블벅을 통해 '고려: 모험의 전당'의 한국어 번역판 작업을 위한 펀딩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상황. 펀딩 종료를 약 한달 가량 남겨둔 7월 마지막 주를 기준으로 목표액의 46%를 달성하는 등 국내에서도 많은 TRPG 팬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뉴질랜드에서 창작과 관련된 공부를 하던 그가 어떻게 한국 신화를 기반으로 한 TRPG를 만들게 되었을까? 올리안 레네는 "사람들이 고려 모험의 전당을 플레이하는 동안에는 내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줬으면 한다"라며 "누가 책을 만들었는지 보다는 게임 안에 담긴 한국 고유의 정서와 세계를 즐겨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D&D 5판 호환 '고려: 모험의 전당', 신규 클래스 '무당'과 '평판' 시스템으로 재미 더했다


 

 

올리안 레네의 첫 TRPG 프로젝트 '고려: 모험의 전당'은 '던전앤드래곤' 공식 5판과 호환된다. '던전앤드래곤' 이외에도 '패스파인더 RPG'와 'OSR(Old School Revival/Renaissance)' 시스템과 호환되는 버전이 있으며, 이 두 버전은 추후 펀딩의 성과를 지켜본 뒤 한국어 번역본 출간을 고려할 예정이라고.

 

올리안 레네는 '고려: 모험의 전당'에 대해 '요리책'과 같은 TRPG 캠페인 북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고려: 모험의 전당'에서 플레이어들은 모험가가 되어 직업을 선택하고 임무를 수행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데, 이 과정이 여러 재료들을 모아 요리를 완성하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 남쪽 나라에 출몰하는 요괴를 토벌하는 기초적인 퀘스트 이외에도 학자들의 나라로 가서 과거 시험을 보는 학생들을 호위하는 등 좀더 복잡하고 긴 임무들도 준비되어 있다.

 

'던전앤드래곤' 공식 5판에 더해 '고려: 모험의 전당'에서는 신규 클래스 '무당'과 '평판' 시스템을 만나볼 수 있다.

 


 

'무당'은 한국적인 정서를 가미한 신규 클래스로, '고려: 모험의 전당'의 세계에 존재하는 영혼(귀신)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직접적인 전투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무당처럼 '굿'을 통해 영혼들과 소통하고 그 기운을 이용할 수 있어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플레이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강이나 산 등 각 지역에는 그에 맞는 특성을 가진 영혼들이 있어 상황에 따라 다른 장소에서 '굿판'을 벌여야 한다고.

 



 

'평판' 역시 '고려: 모험의 전당'이 선보이는 새로운 시스템이다.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평판'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데, 평판의 상태에 따라 임무의 난이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 플레이어의 평판이 낮을 경우에는 암살이나 약탈 등의 임무만 수령할 수 있는 반면, 평판이 높다면 플레이어가 방문하는 마을에서 그들을 반겨주는 등 게임 내에서 크고 작은 변화들이 발생한다. 이에 평판의 상태에 따라서만 수행할 수 있는 임무나 입장할 수 있는 지역이 달라져 '분기점' 같은 역할을 할 예정이다.

 

올리안 레네는 컨벤션 홀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TRPG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평판' 시스템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개중에는 선한 역할을 하면서 세계의 영웅이 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또 일부 플레이어 중에서는 학살이나 약탈 등의 플레이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라며 "고려 모험의 전당을 통해서는 이런 방식의 플레이를 또 하나의 재미 요소로 담아내고자 했다. 평판 시스템을 통해 좀더 다양한 플레이 방식을 인정하고 다채로운 모험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적인 소재 잘 잡아낸 설정, 정부 자료와 대중문화까지 찾아가며 조사했다

 

'고려: 모험의 전당'에 등장하는 용
 

단순히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무당'이 등장한다고 해서 한국적인 게임이 될 수는 없다. '고려: 모험의 전당'은 게임의 외관뿐만 아니라 곳곳에 숨겨진 설정에서도 올리안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느껴볼 수 있다.

 

TRPG는 물론 대부분의 RPG에서 등장하는 '용(드래곤)'을 대하는 방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구권에서 용은 흔히 욕심이 많고 재앙과 관련된 경우가 많아 "모험가들이 힘을 합쳐 용을 쓰러트린다"라는 전개가 자연스럽다. 반면,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용은 성스러운 존재처럼 여겨지기에 '고려: 모험의 전당'에서 용을 죽이는 행위는 세계관 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올리안 레네의 설명이다.

 

그는 "한국 신화에서 이무기가 용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기도하고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라며 "만약 용이 죽는다면 그 오랜 시간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고려 모험의 전당에서 용이 죽는 것은 엄청난 비극처럼 묘사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무기가 용으로 변하지 못하고 타락한 '깡철이(강철이)' 역시 '고려: 모험의 전당'에서 만나볼 수 있을 예정이다.

 

한옥 등 한국 문화를 만나볼 수 있는 일러스트도 포함되어 있다
 

'한민족'이라는 한국 특유의 정서도 게임에 반영되어 있다. '던전앤드래곤'을 비롯한 대부분의 TRPG에서는 클래스와 함께 캐릭터의 종족도 선택하게 되지만, '고려: 모험의 전당'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율려'와 '마고'로부터 탄생한 것으로 묘사되며 이에 따라 종족의 구분도 없다는 것. 종족을 선택할 수 없어 해외 시장에서는 인종 차별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올리안 레네는 한국 만의 특수한 정서를 반영하기 위해 이런 설정을 넣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한국에 대한 각별한, 어쩌면 한국 사람보다도 방대한 한국 신화에 대한 올리안 레네의 관심은 무려 10년 전, 그가 처음 한국에 방문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게임 이외에도 영상, 텍스트 등 다양한 방면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오는 그에게 신화는 매력적인 소재일 수밖에 없다. 이에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와 '신과 함께' 등 한국 신화를 다룬 대중 문화들을 찾아 다니면서 한국 신화의 기반이 되는 세계관과 관련 요소들을 연구했다는 것이 올리안의 설명이다.

 

한국 문화에 대한 해외 관심 높아져, 상상의 제약 없이 마음껏 게임 즐겨 달라

 



 

한편, 최근 한국적인 소재나 문화를 다룬 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에 K-게임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제대로 한국의 역사나 생생한 문화를 조명한 게임이 드문 상황.

 

올리안 레네는 이에 대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은 1955년 전쟁 당시에 멈춰 있었다. 시장에 새로운 선례를 만들고 성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동안 한국을 소재로 한 게임이 드물지 않았나 생각한다"라며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 대해 아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으며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도 역시 높아지고 있다. 트렌드가 변하고 있는 만큼, 곧 한국을 소재로 한 게임이 나오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국내에 앞서 해외에서 진행한 '고려: 모험의 전당'에 대한 펀딩 반응 역시 긍정적이다. 한국 신화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해외에서는 "보기 드문 소재"라는 평가들이 주를 이룬 바 있다. 현재 펀딩을 마치고 해외의 펀딩 참여자들에게 책이 배송되고 있는 만큼, 올리안 레네는 하루 빨리 해외 TRPG 마니아들의 반응을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책을 수령하거나 카페에 방문해 고려 모험의 전당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놀라는 편이다"라며 "독립 출판 답지 않게 책의 완성도가 준수하며, 한국적인 일러스트나 설렁탕, 김장, 학원 등 한국에 대한 정보들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내려주더라"라고 말했다.

 



 

이에 해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고려: 모험의 전당'이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올리안 레네의 바람이다. 한국 신화가 낯선 해외와 달리,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고려: 모험의 전당'에 담긴 세계관이나 소재들은 익숙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 

 

가령 서양 문화에 기반한 '던전앤드래곤'에서 서구권 국가의 사람들이 여관(INN)과 같은 게임 내 장소나 상황들을 상상할 때 특별한 제약이 없지만, 해당 문화권에 익숙하지 않은 국내 게이머들은 '던전앤드래곤'을 즐기면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에 '고려: 모험의 전당'을 통해 한국 사람들도 서구권 게이머들처럼 TRPG 속 상황을 더 자연스럽게 느끼고 게임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올리안 레네는 "고려 모험의 전당을 만들면서 각 이야기, 등장인물, 고을이 어우러진 생생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며 "각 고을마다 다른 환경, 정치적 요소들을 배치해 디테일을 더했다.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여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게끔 이야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신기한 마음으로 접근하더라도 곧 세계 자체에 매력과 흥미를 느끼고 오래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한국 신화를 기반으로 한 TRPG 어드벤처북 '고려: 모험의 전당'은 한국어 번역판 작업을 위해 텀블벅에서 펀딩을 진행 중이다. 저자 올리안 레네는 "높은 현지화 퀄리티를 위해 펀딩을 진행하는 만큼 많은 TRPG 마니아와 국내 게이머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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