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티 사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평가가 정점을 향해 가던 2017년, 히어로 코믹스계의 양대 산맥이었던 'DC 확장 유니버스(DCEU)'는 여러모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맨 오브 스틸'이 보여줬던 가능성은 '배트맨 대 슈퍼맨'으로 한풀 꺾였고, '저스티스 리그'가 결정타로 작용하면서 영화 분야에서 마블에게 완전히 패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저스티스 리그'로 확장 유니버스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던 '잭 스나이더'가 감독에서 하차하고, 이를 대신해 '어벤져스' 등을 연출했던 '조스 웨던'이 '저스티스 리그'의 후반부 작업을 맡았는데 당시의 결과물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하게 '슈퍼맨'으로 끝나는 이야기 구조는 물론이고, 빌드 업이 부족했던 탓에 개별 히어로들의 매력도 상당 부분 퇴색되었던 것이 혹평의 주된 원인이었다.
이에 히어로 영화 팬 사이에서 '잭 스나이더'가 원래 만들고자 했던 '저스티스 리그'는 '엘 도라도'며 '유니콘'이자 마지막 한 줄기 희망과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나이더 감독이 촬영한 분량 중 실제 극장판에 활용된 것이 4분의 1 수준이었기에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나머지 분량이 기존 작품의 아쉬움을 덜어낼 수 있다는 것. 다만 이미 앞서 극장판이 정사로 취급받고 후속작이 극장판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잭 스나이더' 버전의 공개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이 엇갈려 왔다.
간절히 바라면 응답하는 것일까, '우마무스메' 게임 버전의 출시와 '월희' 리메이크와 더불어 서브컬쳐 팬덤의 오랜 숙원 중 하나였던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가 지난 3월 19일 드디어 공개되었다. 국내에서도 각종 IPTV와 영상 플랫폼을 통해 작품이 공개되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진짜' 저스티스 리그를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4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은 걱정과 달리 빠르게 지나갔고, 또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매력적인 세계가 펼쳐졌다. 잭 스나이더 감독이 그리던 '저스티스 리그'와 확장 유니버스를 더 만나볼 수 없다는 점이 퍽 아쉬웠고, 한편으로는 극장이 아닌 안방에서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조스 웨던은 마블이 보낸 첩자임에 틀림없다.
시작과 끝은 같지만, 더 늘어난 영웅들의 이야기와 연출
이번에 공개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이하 스나이더 버전)'와 극장을 통해 상영되었던 '저스티스 리그(이하 극장판)'의 가장 큰 차이는 대폭 늘어난 러닝 타임이다. '마더 박스'를 탐내는 '다크 사이더스' 군단의 수하 '스테판울프'가 지구로 내려오고,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여러 슈퍼 히어로들이 힘을 합친다는 극장판의 줄거리는 그대로다. 시작과 끝은 같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스나이더 버전'의 핵심인 셈.
예고편에서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스나이더 버전'에서는 극장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 상당 부분 추가되어 있다. 단순히 러닝 타임을 늘리기 위한 장면들이 삽입된 것이 아니라, 극의 전개 상에서의 개연성과 각 슈퍼 히어로들의 매력을 부각시키고 영화의 흡입력을 한층 끌어올려줄 수 있는 장치들을 4시간 안에 꽉꽉 눌러 담았다. 처음에는 극장판과의 차이점에 주목하려 했으나, 완전히 별개의 영화라는 느낌이 들어 머리를 비우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극장판에서 팬들이 느꼈을 위화감과 아쉬움, 궁금증들은 '스나이더 버전'에 모두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마더 박스'는 극장판의 경우 “어딘가 중요하고 엄청난 물건이긴 한데 과연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위력과 설명이 부족했는데, '스나이더 버전'에서는 슈퍼 히어로 6명이 뭉쳐서 막아낼 만한 물건이라고 느껴질 만큼 그 파괴력이 잘 묘사되어있다. 목적이 분명해지니, 극에 몰입도 잘 됐다. 이정도로 대단한 물건을 몰라봐서 죄송한 마음이다.
'기승전 슈퍼맨'으로 귀결되었던 극장판에 비해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라는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도 잘 표현되어 있다. 각 히어로도 충분히 강력하지만, 사실 '슈퍼맨' 아래에서는 모두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게 'DC 확장 유니버스'의 약점. '스나이더 버전'은 이런 작품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완력 다툼이 아니라 각 히어로들의 성격,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 서로가 함께 협력할 때 비로소 강적을 돌파할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스포일러로 인해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분명 '슈퍼맨'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영화 상에서는 있다.
각 영웅들의 서사가 추가되면서 '플래시'와 '사이보그'는 '스나이더 버전'의 최고 수혜자로도 평가할 수 있다. 두 영웅 모두 사전에 개인 영화 없이 '저스티스 리그'로 첫 선을 보이게 되었는데, 극장판에서는 이 둘의 심리적 상황과 배경에 대한 설명이 많이 부족해 “그냥 철 없는 찌질이”와 “화만 내는 로봇” 정도로 비춰졌다. 대신 '스나이더 버전'에서는 두 히어로 모두 저마다의 사연, 그리고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려내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탄생시켰다. '플래시'의 서사 구조, 클라이맥스에서의 연출은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마음에 들더라.
이 밖에도 '저스티스 리그'의 구심점으로서 활약하고 총기와 각종 병기들을 총동원해 한계를 돌파하는 '배트맨'과 무식한 파워로 돌격하는 '아쿠아맨', 그리고 전투광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원더우먼' 등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히어로들의 매력이 강화되었다. 극장판의 혹평에 배우들이 유독 낙심한 이유가 '스나이더 버전'과 극장판 사이에서의 괴리 때문이었음이 공감되는 부분이다.
과도한 슬로우 모션 -10점, 화려한 볼거리 +20점
'300'에서 정점을 찍고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는 조금 완화되는 듯했던 스나이더 감독 특유의 '슬로우 모션' 사랑은 '스나이더 버전'에서 다시 등장했다. 영화 전 구간에 걸쳐 슬로우 모션 연출을 애용하는 모습들을 주로 보여주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슬로우 모션을 남발하는 일이 잦아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슬로우 모션만 줄이더라도 영화의 러닝 타임이 한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영화의 러닝 타임 4시간 중 각 영웅의 결집, 개별 서사에 전반부를 활용하고 후반부는 대규모 전투에 할애했다. 문제는 전반부에 해당하는 분량에서도 너무 자주 슬로우 모션을 남발한다는 점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대규모 전투 없이 인물들의 대화, 혹은 소규모 교전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전반부에서는 슬로우 모션으로 인한 단점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후반부로 접어들면 이런 문제는 조금 완화되는 것이 다행.
대신 액션에서는 스나이더 감독의 역량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다소 밋밋했던 극장판에서의 액션 연출 대부분에 속도감과 타격감이 더해졌으며, 건물 몇 개쯤은 가볍게 부숴버리는 초인들의 전투가 잘 표현되었다. 초능력이 없는 '배트맨'도 '스나이더 버전'에서는 그 만의 역량을 살린 전투를 선보인다. 같은 괴력이라도 히어로에 따라 전투 스타일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등, 액션에 대해서는 역시 스나이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판이 있기에 가능했던 '재평가', 아쉬움 씻어내고 간다
한편, 팬들의 오랜 기다림에 부응하듯 등장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공개 이후 연일 화제의 중심이다. 그동안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4분의 3 분량으로 '저스티스 리그'라는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평가. 인물 개인의 매력이 배가된 것은 물론, 전투 연출에 있어서도 크게 거슬리는 부분이 없이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는 반응들이다.
다만,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가 극장에 개봉되었더라도 지금처럼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고는 확신하기 어렵다. 4시간에 달하는(물론 당초 계획은 이 4시간 분량을 두 편으로 쪼개는 것이라고 할 지라도) 러닝 타임은 일반 관객들이라면 쉽게 도전하기조차 쉽지 않으며, 또 여전히 탄탄한 기반 없이 확장 유니버스를 전개하기에는 갑작스러운 감도 없지 않다. 전반적인 평가는 어디까지나 극장판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스나이더 버전에서 그리고자 했던 그림은 생각보다 컸지만, 아쉽게도 극장판과는 설정이 다른 부분들이 꽤나 있고 이쪽이 이미 정사 취급을 받기에 그가 생각했던 이야기 전개를 만나기는 쉽지 않겠다. 영화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것처럼 10만개가 넘는 우주 중 스나이더 버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그럼에도 그냥 뭍어두기에는 아쉬운 설정들이 꽤나 있기에, 히어로 영화 팬들도 스나이더 버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는 것이 아닐까?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승리호'와 더불어 코로나19의 수혜를 제대로 입은 영화인 것 같다. 국내에서는 통신사의 IPTV나 카카오페이지, 구글 플레이 등을 통해 영화를 구매할 수 있다. 영화의 비율은 4:3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스나이더 감독의 취향상 색감도 어둡고 유혈 묘사가 적나라한 편이다. 여러 플랫폼을 비교해보고 자신의 시청 성향과 가장 잘 맞는 플랫폼에서 주말 동안 시간을 내 여유롭게 즐겨보는 것이 좋겠다. 굳이 극장판도 다시 봐서 비교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여러분의 두 시간은 그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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