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 신화의 창시자이자 호러물의 대가 'H.P 러브크래프트'
판의 미로, 헬보이 시리즈로 유명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드디어 오랜 소원을 풀게 됐다. 지난 2006년부터 꾸준히 도전해 왔던 게임개발의 꿈을 THQ와 손잡고 드디어 이루게 된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최근 MTV와의 인터뷰를 통해 오는 2013년 자신의 첫 게임을 출시 할 예정이며, 장르는 러브크래프트 형식의 호러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델 토로 감독 관련기사 보러가기
이미 판의 미로, 헬보이 등의 영화를 통해 독특한 세계관을 피력했던 델 토로 감독은 그의 첫 게임 개발에서도 러브크래프트식 호러물이라는 장르를 선택하며,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게이머들에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그렇다면 대체 델 토로 감독이 선택한 러브크래프트 호러물이란 무엇일까?
러브크래프트, 우리에게 워낙 익숙한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 등의 전략시물레이션 게임시리즈 덕분에 흡사 전략 연예시뮬레이션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러브크래프트는 사실, 미국의 유명작가의 이름이다.
J.R.R 톨킨과 함께 거론될만큼 판타지 문학의 거장
흔히, 러브크래프트라고 불리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는 미국의 유명한 판타지 SF작가로 국내에는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아버지 J.R.R.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이 창조한 중간계 판타지 신화와 비견될만한 크툴루 신화를 창조한 인물로 '빛의 세계에 톨킨이 있다면 어둠의 세계에는 러브크래프트가 있다'고 회자될 만큼 톨킨과 함께 판타지 문학의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생전의 러브크래프트는 그다지 저명한 작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 지난 수십년간 독자들과 비평가들로 부터 그의 작품이 재평가 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평가도 점점 상승해 현재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호러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생전에는 소설 보다 철학, 과학, 비평,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해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후대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종종 애드가 앨런 포와 비교되기도 한다. 스티븐 킹은 러브크래프트를 "고전 호러물에 있어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문의(the Twentieth Century"s greatest practitioner of the classic Horror tale)."라고 부르기도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1890년 8월 20일, 로드 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 시 엔젤 거리의 작은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윈필드 스콧 러브크래프트는 보석과 귀금속의 외판원이었으나 러브크래프트가 3살이던 1893년, 업무상 여행 도중 시카고 호텔에서 정신병에 걸려 버틀러의 정신병원에서 1898년 여생을 마쳤다. 그때가 그의 나이 8살때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러브크래프트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여섯 살 때 까지 여장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당시에는 남자아이를 여장시켜 키우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는 설도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어릴 때 비쩍 마른 체격에 상당히 못생긴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외모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 마저 러브크래프트의 외모를 추하다(ugly)고 평가했을 정도니 어렸을 적 그의 외모가 어땠는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두 살때 시 암송, 여섯살 때 창작 시를 완성했던 천재 작가
하지만 신은 항상 공평했다. 최악의 외모와는 달리 그는 두살 때 시를 암송하고, 여섯살 때 창작 시를 완성했던 천재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러브크래프트의 독서를 격려하여 러브크래프트에게 아라비안 나이트, 일리아스, 오딧세이, 토마스 불핀치의 우화 등 다양한 고전문학들을 제공했다. 특히, 러브크래프트에게 자신의 창작 고딕 호러 동화를 들려줌으로써 러브크래프트가 괴기호러물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가 아들을 불량아로 만들까봐 걱정했다고 전해진다.
유년시절의 러브크래프트는 병치례가 잦았다. 건강 때문에 러브크래프트는 학교에 거의 다니지 못했으며,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그는 독서에 탐닉했고 화학과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아마도 이 기간이 후에 러브크래프트가 작가로서 인생을 여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인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러브크래프트는 소설도 조금 쓰긴 했지만 그가 내놓는 작품은 여전히 주로 시였다. 이 기간동안, 러브크래프트는 은둔 상태로 지냈으며, 어머니를 제외한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이것은 러브크래프트가 'The Argosy'라는 잡지에 편지를 쓰게 되면서 바뀌게 된다.
이 잡지사에 보낸 편지에서 러브크래프트는 출판 작가들이 재미 없는 연애소설이나 쓰는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았는데, 이 편지를 받아 본 잡지사에서는 러브크래프트의 편지 내용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고 이 토론을 지켜 본 UAPA(미국 아마추어 출판 협회) 회장 에드워드 다아스가 러브크래프트에게 협회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가 1914년이었다.
러브크래프트의 초창기 작품인 'The Tomb'
UAPA는 러브크래프트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이었다. 러브크래프트는 UAPA에 가입해 시와 에세이를 지속적으로 기고했으며, 1917년에는 서신 교환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The Tomb', '데이곤'과 같은, 보다 세련된 소설 작품들과 함께 소설 창작에 돌아섰다. 데이곤은 러브크래프트의 첫 출판작이었다.(1919년 11월, W. 폴 콕의 The Vagrant에 수록) 이 시기에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편지 친구들과의 방대한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러브크래프트의 긴 서한들은 그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편지 작가 중 한 명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와 편지를 나눈 사람 중에는 로버트 블록, 클락 에쉬튼 스미스, 로버트 하워드와 같은 이들도 있었다.
1921년 러브크래프트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러브크래프트는 러브크래프트는 보스턴에서 열린 UAPA 컨벤션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러브크래프트는 후에 배우자가 될 소니아 그린을 만났다. 소니아 그린은 우크라이나 유태인 혈통으로, 러브크래프트보다는 7살이 많았다. 그들은 1924년에 결혼했고, 이 커플은 뉴욕 시 브루클린 자치구로 이사했다. 처음에 러브크래프트는 뉴욕에 매료되었지만 곧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모자가게를 운영했던 소니아는 모자 가게를 잃었고, 빈약한 건강 상태 때문에 고생을 해야 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를 돕기 위한 일을 찾는데 실패했고, 결국 소니아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클리브랜드로 이사해야 했다. 소니아가 떠난 후 러브크래프트는 브루클린의 레드훅 지구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으며 뉴욕에서의 삶을 격렬히 혐오하게 되었다. 더욱이 뉴욕으로 엄청나게 밀려드는 - 특히 비 앵글로 색슨 계통의 이민자들 - 때문에 아무런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이 참담한 실패는 그의 인종차별주의를 부채질했으며, 당시의 심정은 그의 작품 '레드훅의 공포'에 잘 나타나 있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러브크래프트는 아내인 소니아와 이혼하게 된다. 이혼 후 러브크래프트는 고향인 프로비던스로 돌아오게 되고 프로비던스에서 그는 소설 쓰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나 어스타운딩 스토리(Astounding Story) 같은 싸구려 펄프잡지에 중/단편을 쓰기 시작했으나 1928년 위어드 테일즈에 '크툴루의 부름'(The Call of Cthulhu)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크툴루 신화'의 설정을 시작하게 된다.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통칭 그레이트 올드 원(Great old one, 위대한 옛 존재) 중 하나
-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