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개발자가 만들어낸 역사에 남을만한 게임 '최악의 재액인간에게 바친다', 개발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등록일 2019년02월19일 17시30분 트위터로 보내기
 
지난해 도쿄게임쇼 취재차 일본을 방문한 기자는 매년 그랬듯 아키하바라 게임매장을 찾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게임들을 살펴봤다.
 
게임을 둘러보던 중 강렬한 패키지 일러스트와 제목으로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게임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 게임사 켐코(KEMCO)의 '최악의 재액인간에게 바친다'(最悪なる災厄人間に捧ぐ, 일본어 약칭은 さささぐ)와의 만남이었다.
 
게임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지만 제목이 마음에 들어 일단 구입하고 봤는데... 귀국한 후 게임 보관함에 쌓아두고 잊고 있다 해가 바뀌고서야 구입해둔 게 생각나 꺼내 플레이해봤다.
 


 
이 게임은 투명인간 소녀와 투명인간 소녀만 볼 수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은 히로인과 주인공 2명 뿐이지만, 이 두 사람의 다양한 면을 담으며 100만자 이상의 장대한 스토리를 펼쳐내고 있다.
 
평범한 텍스트게임이겠거니 하고 '조금만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게임을 실행한 기자의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실종되고 말았으니... '최악의 재액인간에게 바친다'는 상상 이상으로 몰입감이 강한, 강렬한 스토리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펼치는 드라마, 그리고 복선을 모두 회수하고 제대로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담은 게임이었다.
 
텍스트 게임을 이 정도로 몰입해서 플레이한 것은 2010년대에 들어서는 '슈타인즈게이트'가 유일했던 것 같다. 이 정도로 캐릭터를 잘 배치하고 이야기를 잘 끌어나가 마무리까지 잘 한 이야기는 근래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시나리오를 한명이 쓰고 그림까지 직접 그렸다고 하니... 텍스트 게임에서 00년대에 그랬듯 지금도 천재 크리에이터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작가들이 배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임을 끝내고 일본의 게임사에 메일을 보냈다. '인터뷰 한번 합시다'. 흔쾌히 하자는 답변이 와 개발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마련됐다.
 
이 게임은 일본 PS 스토어 및 닌텐도 스위치 e샵에 다운로드 버전이 출시되었고 플레이스테이션4 버전은 패키지도 출시된 상태이다. 해외 전개 예정은 아직 없어 국내 게이머들이 한국어로 이 게임을 즐기게 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일본어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이머라면 꼭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언어의 장벽으로 플레이하지 못하는 게이머라면 인터뷰를 통해 게임에 대한 내용과 개발자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느꼈으면 한다.
 
개발팀에 대한 이야기
이혁진 기자: 한국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개발사인 '워터피닉스'에 대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R: 대표 및 기획을 담당하는 케이챠(ケイ茶)와 시나리오 및 일러스트를 담당하는 R로 구성된 2인팀입니다.
 
저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항하는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워터피닉스 단독으로 2개의 작품('一緒に行きましょう逝きましょう生きましょう', '結婚主義国家')를 스마트폰 및 PC 플랫폼으로 출시했습니다.
 
이번 최신작 '최악의 재액인간에게 바친다'(最悪なる災厄人間に捧ぐ)는 KEMCO사와 협력해 처음으로 콘솔 플랫폼으로 발매했습니다.
 


 
시나리오 및 일러스트를 모두 담당한 'R' 씨에 대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R: 저는 본래 취미로 시나리오나 일러스트를 쓰고 그려 왔습니다.
 
그러던 중 케이챠(ケイ茶, 이번 작품의 기획 담당)에게 노벨게임을 만들자고 권유받아 둘이서 동인활동으로 '기억인형의 기억상실'(記憶人形の記憶喪失), '신님의 고향'(神様のふるさと)과 같은 노벨게임을 제작했습니다.
 
그 뒤 주식회사 워터피닉스로서 활동을 시작해 계속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소녀와 함께 종말세계를 여행하는 '一緒に行きましょう逝きましょう生きましょう', 18세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처형당하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단편 연작 '결혼주의국가'(結婚主義国家)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일부 배경 등에서 소재를 활용한 것도 있습니다만 모든 작품에서 기본적으로 일러스트와 시나리오는 모두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개발에 소요된 시간, 특히 100만자 이상의 문장을 작성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궁금합니다
R: 시나리오는 도중에 수정하는 일이 많았는데, 초고를 작성하는 데 약 1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KEMCO사의 감수를 받으며 좀 더 좋은 이야기로 완성하기 위해 반년 정도를 더 공들여 현재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일러스트는 기본적으로 하루 안에 시나리오를 압축한 일러스트를 그린다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확하게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잘라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일러스트에만 집중해 그린 기간은 1개월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음성 수록이나 게임화를 위한 기간도 포함해 전체 개발기간은 약 2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매력적인 시나리오에 대한 설명
복선 회수가 매우 잘 되었고 읽어나가며 궁금했던 점이 대부분 잘 설명되어 다 읽고 나면 매우 상쾌한 기분이 되더군요. 이 작품의 기획의도와 함께 처음부터 이야기의 결말을 정해두고 써 나갔는지 아니면 개발 과정에서 결말이 바뀌었는지가 궁금합니다
R: 이 작품은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는 두 사람을 철저하게 그려낸다'는 콘셉트로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어떻게 하면 두사람만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을까,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에 대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많은 안을 생각했다 폐기하길 반복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야기의 큰 줄거리나 캐릭터의 성격, 세계관까지 몇번이나 전혀 다른 형태로 변화한 셈입니다. 현재의 '투명인간 소녀와 투명인간만 볼 수 있는 소년'이라는 형태로 정해진 뒤에는 결말을 정해두고 이야기를 전개했습니다.
 


 
본편의 결말, 그리고 그 뒤의 '마지막'의 전개에 무척 감동했습니다. 각각의 전개에 대해 처음부터 정해두고 시나리오를 써 나간 것인지요
R: 사실 처음에 그려내고 싶었던 건 '마지막' 부분이었으므로, 플롯은 그 '마지막'에서부터 만들어 나간 셈입니다.
 
그 시점에서 대강의 줄거리는 결정되어 있었고 중간에 변경한 부분은 없습니다.
 
다만 설정의 모순점이나 클라이막스 신에 대해서는 감수를 해 주신 amphibian('레이징 루프'(レイジングループ) 등으로 유명한 크리에이터)씨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 주셔서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완성도로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본편 역시 결말의 방향성은 정해두고 진행했습니다. 다만 복잡한 설정이나 '마지막'과의 관련성을 포함해 실제 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굉장히 애를 먹었고 납득할만한 마무리가 되지 않아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감수를 받아 괜찮게 마무리할 수 있었고, 현재의 모습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본편의 라스트 신에서는 결말을 일부러 조금 애매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의도가 궁금합니다
R: 시나리오라이터로서는 본편의 라스트 신 이후에 대해서도 명확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그려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로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편의 라스트는 일부러 애매하게 묘사했습니다. 뭔가 하나의 전개를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고 본편을 끝까지 본 분들 한사람 한사람이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재액인간에게 바친다'를 읽고 최근 보기 드문 강렬한 메세지를 담은 게임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한 게이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R: 이번 작품에는 다양한 생각을 담았습니다만, 가장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리 자기자신이 최저, 최악의 존재라고 느껴지더라도, 스스로를 싫어하진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집안일을 잘 하는 사람, 다양한 사람과 말이 잘 통하는 사람, 뭔가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 등. 이들은 모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밖을 걸어다닐 뿐인 사람도, 밥을 먹고있는 사람도 대단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게 '당연한 것'이라거나 '보통'이라며 눈길을 주지 않고 '틀려먹었다'며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거나, 혹은 스스로를 책망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분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훌륭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써낸 것입니다.
 
스토리를 작성,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 한정짓지 말고 R씨가 영향을 받은, '최악의 재액인간에게 바친다'를 읽고 감동받은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R: 설정 면에서 눈치챈 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작품은 '니트로플러스'에서 발매한 '사야의 노래'(沙耶の唄)라는 게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임팩트 있는 설정만으로 끝나지 않고, 주인공과 히로인의 관계성, 타인과의 관계 등이 짧은 시간 속에 농밀하게 그려지고 있어서 무척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두 사람의 세계'나 '귀여운 여자아이'라는 점에서는 Key에서 선보인 '플라네타리안 ~작은 별의 꿈~'(planetarian ~ちいさなほしのゆめ~)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야의 노래'와 '플라네타리안' 모두 단편이지만 주인공과 히로인이 교류하는 모습이나 애절한 세계관 등이 군더더기 없이 표현되고 있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플레이한 작품들입니다.
 
두 작품 모두 '최악의 재액인간에게 바친다'가 마음에 드셨다면 즐겁게 플레이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매력적인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
얼굴이 등장하는 것은 히로인 '쿠로' 한명 뿐입니다만, 이 쿠로가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이야기에 몰입해 술술 읽어나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의 콘셉트는 어느 시점에서 확정되었는지 궁금합니다
R: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번 작품은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는 두 사람을 철저하게 그려낸다'는 콘셉트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에 바탕해 '어떤 히로인이어야 그런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 성격, 성장한 환경, 이야기 시작 지점에서의 상황 등을 결정했습니다.
 
주인공 효마와 히로인 쿠로의 설정이 결정된 후에 세계의 설정이나 룰, 이야기의 흐름을 생각한 것이라 거의 처음부터 확정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쿠로 외에는 주인공을 포함해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묘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묘사한 의도가 궁금합니다
R: 두 사람의 세계라는 점을 묘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에게 있어 쿠로는 유일한 인간이자 유일하게 흥미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정말 인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애초에 거기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불확실하고 기분나쁜 존재입니다.
 
그래서, 독자들도 같은 입장이 되어서 주인공이 보는 세계의 고독감과 이상성(異常性)을 느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캐릭터들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불행한 환경 속에서도 무척 상냥하고 착한 쿠로의 모습에 몇번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쿠로라는 캐릭터의 설정, 디자인에서 신경쓴 부분은 어떤 부분인지, 독자들에게 이렇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고 의도한 부분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R: 이야기의 흐름상 쿠로라는 캐릭터는 주인공 효마에게 편리한, 기대게 되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그저 '편리하고 기대게 되는 존재로 만들어 집어넣은 캐릭터'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효마에게 편리하고 기대게 되는 존재가 되지만, 쿠로가 처한 상태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흐름이었다'고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신경썼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쿠로의 다양한 면이 그려집니다만, 어떤 면을 그려내더라도 중심이 되는 '어린 시절의 쿠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의식해서 시나리오를 써 나갔습니다.
 
주인공의 경우, 특정 파트에서는 음성이 나옵니다만, 스스로 화자가 될 때에는 음성이 나오지 않더군요. 이 부분도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인가요
R: '자기 자신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는 주인공의 특수성을 보여주기 위해 기본적으로 음성은 넣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인공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채로는 독자들도, 주인공 스스로도 자기 목소리를 모르는 채로 끝나버립니다.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야 하는 전개가 되는데, 그런 장면에만 음성을 넣어둔 것입니다.
 


 
본편의 스토리에 후일담 느낌의 이야기를 붙인다면 어떤 형태가 될지 궁금합니다. 생각해 두신 게 있는지요
R: 앞서 설명했듯, 본편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5개의 세계의 쿠로들에 한정해 이야기한다면, 어떤 쿠로라도 효마와 함께 고민하고 상담해 가며 각각의 길을 찾아내 나아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리더'도 굉장히 인상적인 캐릭터였습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리더'라는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R: '리더'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는 존재입니다.
 
기본적으로, 쿠로는 효마에게 편리하고 기대게 되는 존재로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리더'는 특히 그런 면이 부각된 쿠로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효마에게 매우 불편하고 꺼려지는 쿠로이기도 합니다.
 
그런 두 가지 시각이 가능하다는 점이 그녀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쿠로라는 인간을 그려내는 한, '리더'의 존재는 없어선 안된다고 생각해 힘줘서 그려냈습니다.
 


 
여기까지 홀로 100만자에 달하는 훌륭한 이야기와 매력적인 일러스트를 모두 만들어낸 크리에이터 R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일본어로 게임을 즐기는 데 문제가 없는 게이머라면 꼭 플레이해보시기 바란다. 이렇게 멋진 이야기와 텍스트게임사에 남을 매력적인 캐릭터 쿠로를 언어의 장벽에 막혀 만나보지 못할 게이머가 많을 거라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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