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공 : 알송규의 버드나무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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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만화라는 매체를 즐겨온,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것에 취미가 있었던 사람이 만화에 대한 글을 쓰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글들이 카페나 블로그 등에 따로 게재되어 활성화되는 것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죠. 단지, 만화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이 그렇게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몇 달 전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벨기에 출신의 한 방송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는데, 벨기에는 만화 강국이에요.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고 부르면서…” 그 장면에 프랑스 출신의 방송인 역시 격하게 공감했는데 벨기에만이 아니라 예술 강국인 프랑스 역시 만화를 제9의 예술로 대접하며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어떤 만화는 소통의 수단이었고, 또 어떤 만화는 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으며, 또 어떤 만화는 그들의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타국에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는 것 사실 자체가 한국에서 만화를 즐겨온 팬의 입장에선 굉장히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한국, 그리고 만화. 그렇게 좋은 궁합으로 느껴지는 단어들은 아니죠? 실제로 만화는 오랜 시간 한국에서 박해받은 문화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즐기는 이들에겐 일종의 죄책감을 안겨주었고, 외부의 이들에겐 일종의 책임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만화의 악영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런 책임감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사실은 만화의 위상이 급격히 상승한 2010년대 중반인 현재에 와서도 어느 정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해당 방영분에서 언급되었던 바로 그 만화. <땡땡의 모험Les aventures de Tintin>
사실 한국에서 만화는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문화였습니다. 70년대 '태권V'를 비롯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얻었고, 80년대엔 '아기공룡 둘리'와 '열네 살 영심이', '날아라 슈퍼보드' 등의 TV 만화 애니메이션이 넓은 연령대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아 수십 퍼센트에 달하는 시청률을 기록했었습니다.
90년대는 또 어땠나요. 1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만화 단행본이 하나 둘씩 등장했고, 잡지만화 시장이 분명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선 웹툰 시장이 태동하고 성숙하여 대중문화 전반에 보다 명확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죠. 그리고 2010년대. 대중문화를 논함에 있어 만화는 더 이상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철인28호’, ‘둘리’, ‘짱구’, ‘마징가’ 등 사실상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한 단어들은 만화와 우리네 일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그만의 파급력을 발휘해 왔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문자와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의 수단으로 삼아 영화에 비해 자유롭게 연출된, 그러면서도 소설에 비해서 유연한 소재가 특유의 공감능력을 발휘한 덕분이었죠.
하지만 이러한 만화의 파급력은 일종의 양날의 칼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만화를 또 하나의 문화로 보고 즐기는 이들은 열광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어린 아이 혹은 그들만의 문화로 치부하며 저급한 문화로 간주하였고, 학생이 할 수 있는 것은 공부 외엔 없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만화를 보고 즐기는 일 자체가 일종의 ‘나쁜 일’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당장 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 초중반까지 만화는 술, 담배, 본드(그러니까 환각제)와 함께 불량청소년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90년대 중반까지도 학교나 교회에서는 만화를 수거하여 불태우는 ‘행사’를 하였고, 60년대까지 거슬러 가면 만화 작가는 문자 그대로 죄인이었으며 독자는 예비 범죄자였습니다. 새로운 문화가 자리잡는 과정에서의 진통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만화는 모든 사회적 어두움에 대한 부당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지금의 게임보다도 심각한 해악으로 여겨졌다면 과연 요즘 청소년들이 믿을까요.
이처럼 만화에 대한 부당한 시선은 특정한 연령대에만 국한된 불안정한 입지, 폐쇄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결부된 결과였습니다. 만화를 이해할 생각도, 이를 설득시킬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이었던 셈이죠.
세계적 흥행과 함께 당시 9시 뉴스에서도 다뤄졌던 디즈니의 <라이온킹The Lion King>
이러한 상황은 90년대, 흔히 이야기하는 대중문화의 황금기를 거치며 변하게 되었습니다. 만화를 그리거나 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회적인 멸시를 받던 과거와는 명백히 달라진 것이죠. 흔히 이야기하는 “'쥬라기 공원' 영화 한 편이 현대차 몇 대분을 판 것만큼이나 돈을 벌었다”라는 말과 함께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도 이뤄졌습니다. 여러 미디어 믹스와 성공 사례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변화는 계속되어 2010년대에 이르러 만화가가 TV에 나오는 건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만화가들의 단체가 주축이 되어 문화의 검열에 반대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도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죠. 사회적인 분위기의 변화가 가장 큰 요소임엔 분명하지만 전자가 불특정다수로부터 호감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후자가 사회적인 지위와 일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성립할 수 없는 일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괄목상대할만한 일인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단연 팬들의 태도일 겁니다. 상업적인 성공 여부를 떠나, 마니아들은 만화 역시 소설이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주장하였고, 보다 자유롭고 떳떳하게 만화를 즐기고픈 몸부림 하에 여러 콘텐츠를 생산하였습니다. 리뷰나 분석 글은 물론 독자적인 개성을 갖춘 별개의 콘텐츠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죠.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과 상업적인 성공이 충돌하는 문화적 과도기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만화가 보다 나은 문화가 될 수 있도록 분명한 방향성을 부여하면서 말이죠.
책장정리좀 해야 하는데
물론 과도기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른이 서점에서 만화나 산다"는 식의 시선은 아직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만화는 단순히 당시 사회상을 표현하는 소재를 넘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매개이자 삶과도 밀접하게 연관을 맺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만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한 팬들의 욕심이 조금 더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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