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소니가 버린 것은 물리 디스크가 아니라 신뢰였다

등록일 2026년07월14일 17시10분 트위터로 보내기

 

나의 방 한 켠 책장에는 여러 게임 패키지들이 꽂혀 있다. 나는 평생을 거의 PC(스팀) 위주로 게임을 해왔지만, 그 와중에도 XBOX 360 시절 즐겁게 플레이했던 '닌자 가이덴2'나 '베요네타' 같은 타이틀들은 여전히 소장하고 있다. 어릴 적 매형이 생일 선물로 사주셨던 '디아블로2' CD와 팬심 하나로 용돈을 모아 구입한 '디제이맥스 트릴로지' 한정판 역시 아직도 책장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이를 구동할 콘솔이나 ODD가 없어 실제로 정상 작동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몇 차례의 이사와 짐 정리를 거치면서도 이 패키지들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그 게임을 플레이하며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부적이자 전리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는 빠르게 변해왔다. 이제는 CD를 기기에 넣지 않아도 다운로드만으로 편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내가 PS4 시절 '몬스터 헌터: 월드'나 '디제이맥스 리스펙트'를 플레이할 무렵에는 이미 디지털 다운로드가 대세로 자리 잡았고, 나 역시 패키지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파는 대신 다운로드 버튼을 누르는 편리함에 익숙해졌다.

 


 

실물이 없는 디지털로의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게임뿐만 아니라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도서 등 수많은 콘텐츠가 이미 디지털 중심으로 이동했고 사람들 역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니의 물리 디스크 생산 중단 결정 자체를 마냥 비난하기는 어렵다. 언젠가는 업계가 맞이하게 될 변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결정 자체보다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과 발표 방식이다. 콘솔 플랫폼에서 디지털 다운로드 비중이 80%에 이를 정도로 역전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사업 효율성을 고려했을 때는 소니가 물리 디스크 생산 중단을 결정한 것은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여전히 약 20%의 이용자는 물리 디스크를 선택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무시하기에는 적지 않은 수치다.

 

만약 소니가 차세대 콘솔 출시와 함께 단계적으로 물리 매체를 축소하는 연착륙 방식을 선택했다면 지금과 같은 이용자들의 반발은 훨씬 적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운로드 시대니까 어쩔 수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납득할 시간조차 이용자들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다름 아닌 신뢰다. 소니는 물리 디스크 생산 종료를 발표하면서 PS3와 PS Vita 스토어 종료도 함께 발표했다. 이 결정은 디지털로 구매한 게임 역시 플랫폼 사업자의 정책에 따라 언제든 서비스가 종료되어 즐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이용자들에게 재확인시켰고, 소유권의 문제를 다시 한번 수면 위에 떠오르게 했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플랫폼 홀더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다름 아닌 이용자들과의 신뢰 관계다. 밸브의 '스팀'이 20년 이상 계정 기반 라이브러리를 유지하며 이용자들에게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해 온 것과 비교하면, 소니는 이번 결정으로 이용자들의 믿음을 스스로 내쳤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이번 소니의 발표가 더욱 씁쓸한 이유는 이용자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조차 부족했기 때문이다. 디스크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업계의 변화, 향후 지원 계획을 충분히 설명하거나 관계자가 직접 비전을 제시하는 방식도 가능했다. 하지만 소니는 짧은 공지 하나를 남긴 채 사실상 소통을 끝냈다. 플레이스테이션 공식 SNS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물리 디스크 생산 중단 철회를 요구하거나 보이콧 운동을 펼치는 이용자들의 의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책적인 보완 역시 뒤따르지 않았다. 디지털 전환을 이용자들에게 설득하려면 단순히 디스크 생산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스팀'과 같은 합리적인 환불 정책을 도입하거나 디지털 구매의 가격 경쟁력을 높일 할인 정책을 마련하고, 가족 공유 기능 확대나 장기적인 라이브러리 보존 정책 등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권리와 혜택을 함께 제시했어야 했다. 당장의 시행이 어렵다면 최소한 이를 위한 로드맵이라도 공개했어야 했다.

 

이러한 결정이 철회되지 않고 그대로 시행된다면 결국 소니에게는 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용자를 위한 정책 개선 없이 사업 효율성만을 앞세운다면 이용자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플랫폼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특히 '스팀'으로 대표되는 PC 플랫폼은 지속적인 할인과 비교적 유연한 환불 정책, 오랜 기간 유지된 라이브러리를 기반으로 꾸준히 신뢰를 쌓아 왔다. 내가 즐기고 싶은 게임이 플레이스테이션 독점작이 아니라면 굳이 특정 플랫폼 생태계에 머물 이유가 없다.

 



 

소니의 이번 발표는 단순히 물리 디스크의 종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의 게임은 '소유'보다 '라이선스(이용 허가)'를 구매하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용자는 게임을 구매하지만 실제로는 플랫폼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이용할 수 있고, 갑작스러운 서비스 종료나 정책 변경에 따라 접근이 불가능해지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를 어떻게 납득시키고 설득하느냐, 또 자연스럽게 이용자들을 그 환경으로 이동시키면서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온라인 상시 연결이 필수적인 게임들이 즐비한 시대이기는 하나, 패키지는 한 번 구매하면 최소한 내 손에 남는다. 하지만 DL 게임들은 플랫폼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그 권리가 보장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일수록 플랫폼 사업자들은 이용자와의 신뢰를 더욱 적극적으로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디지털 생태계로의 전환은 플랫폼 사업자가 이용자의 신뢰를 더욱 두텁게 쌓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용자와의 깊은 신뢰 관계나 걸맞는 개선,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일방적인 통보는 결국 충성스럽던 이용자들을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냉정한 이용자로 돌아서게 만들 뿐이다.

 

방 한 켠 책장에 꽂혀 있는 게임 패키지들을 다시 바라본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이 물건들은 내가 게임과 함께 보냈던 시간과 추억의 물리적인 증거다. 디지털 시대가 더욱 편리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편리함이 이용자의 권리와 신뢰를 희생하는 방향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변화는 피할 수 없지만 그 변화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결국 플랫폼 홀더가 이용자에게 보여주는 신뢰와 배려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책장에서 물리 디스크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용자들이 끝까지 기억하는 것은 디스크가 아니라 플랫폼이 자신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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