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아메리칸 스나이퍼, 카우보이에게 바치는 이스트우드의 레퀴엠

등록일 2015년02월16일 16시55분 트위터로 보내기


* 아래 리뷰 내용 중에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 해설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아직 안 보신, 스포일러를 피하려는 분들은 먼저 극장에서 작품을 본 뒤에 기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 아래 스틸샷들은 보도를 위해 워너브라더스가 배포한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 유명한 윌리엄 머니라고. 리틀 빌은 당신이 69년도에 세상을 뒤흔든, 여자랑 아이까지 죽인 잔인한 악당이래요" -용서받지 못한 자(1992)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등 스파게티 웨스턴의 전설적인 아이콘이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감독, 주연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스스로 서부극의 진혼곡을 울렸다. 여자와 아이까지 쏴 죽인 악명 높은 총잡이였지만 이제는 노회한 늙은이일 뿐인 윌리엄 머니를 연기한 그는 용서받지 못한 자로 1992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며 감독으로서도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그 후로도 수많은 걸작을 만든 그는 한 자서전에 관심을 갖게 된다. 카우보이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공식 160명, 비공식 255명을 사살하여 미군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스나이퍼로 전설이 된 크리스 카일의 자서전이다. 그의 이야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의해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영화는 중동의 서부(웨스턴)라고 불리는 팔루자로 첫 파병을 간 크리스 카일이 폭탄 테러를 저지르려는 여자와 아이를 쏘아 죽여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선 것으로 시작한다.

결국 미군에게 자살 폭탄 테러를 가하려던 여자와 아이를 차례로 쏘아 죽인 크리스 카일. 그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되기로 한다. 덕분에 동료들인 미군이 살 수 있었다. 이 때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헐리웃 영화의 터부라고 할 수 있는 여자와 아이가 죽는 장면을 편집으로 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마주 보인다. 마치 크리스 카일이란 스나이퍼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처럼.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보는 관객은 크리스 카일을 따라 전장에서 집으로, 집에서 전장으로 함께 여행을 다니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물리학에서 거시적 현상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고전역학은 미시적 대상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고전역학과 아예 상관이 없어 보이거나 상반되기까지 하는 부분들 때문에 이 미시적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이라는 법칙이 따로 존재한다. 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전쟁과 개인 관점에서의 전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크리스 카일이 투신한 이라크 전쟁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베트남전처럼 미국의 패착이 그대로 드러난 전쟁이었다. 911테러의 연장선상에서 촉발된 이라크 전쟁은 정당성이 부족한 전쟁이었다. 명분으로 든 사담 후세인의 대량 살상 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상 밖으로 장기화된 전쟁은 양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이고 또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경제는 피폐해졌고 민간인 오폭과 고문 문제 등 후폭풍도 거셌다. 하지만 이런 거시적인 관점이 아닌 개개인의 미시적 관점에서의 전쟁은 이와 같은 정치 사회 경제적인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그려지듯 크리스 카일을 비롯한 여러 미군 동료들은 참전한 이유도 목적도 제각각 다르며 이라크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천차만별인 그들도 전장에서는 공통된 선택지로 내몰린다. 사느냐 죽느냐, 살리느냐 죽이느냐. 전쟁 자체를 시작하거나 멈출 수 없는 개인이 전장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단순하고 극단적 선택지 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선택지는 숙고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여자와 아이를 쏘아 죽인다면 한 인간으로서 양심의 큰 상처가 남게 될 것이며 현실적으로도 자칫 잘못하면 민간인 학살의 중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적이라도 여자와 아이를 쏘아 죽일 수는 없다며 총구를 돌린다면 스나이퍼로서 수많은 동료들이 죽게 내버려둔 꼴이 된다. 직업 군인으로서의 직무유기와 동료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막지 못한 죄책감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한 사람에게 너무나도 괴롭고 무거운 선택이다. 이 선택 끝에 전장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신체적인 후유증뿐 아니라 정신적인 괴로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결국 크리스 카일은 적을 죽임으로서 동료를 살리는 길을 택한다. 어렸을 때부터 양도, 늑대도 아닌 양치는 개가 되라고 배운 그다운 선택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는 크리스 카일이 죽인 만큼 살린 사람들이, 죽였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911테러를 보고 단순한 정의감과 애국심으로 네이비실에 자원했던 그도 여러 차례 파병을 거치며 점점 깨져나간다. 그는 자신이 구한 사람 앞에서도 어색해하며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한다. 집에 돌아오면 혼은 전장에 남아 있는 듯하고 모든 일상이 위협처럼 느껴진다. 집보다 전장이 편해보일 정도다.


크리스 카일은 이라크 전쟁에 회의를 품은 동료에게 신, 국가, 가족을 위해 군인이 된 것 아니겠냐고 하지만 이 긍지는 전쟁 앞에 조금씩 부서져나간다. 앞서 말한 대로 전장 후유증으로 가족과 잘 융화되지 못 하는 크리스 카일은 집에 있을 때도 온 신경은 전장에 가 있을 정도로 가족을 소홀히하고 있다. 분노조절장애와 PTSD로 가족의 위험요소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

또한 성전사 문신을 하고 신을 위해 군인이 되었다고 했지만 이 또한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의사와의 정신 상담에서 전장에서 임무 수행 중 후회하는 것은 없냐는 질문에 크리스 카일은 없다며 자신은 신 앞에 떳떳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오기 직전 꺼진 TV 앞에 앉아 자신이 죽게 만들었던 중동 사람들과 지키지 못했던 동료들의 비명소리와 폭음을 환청으로 듣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신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다.

국가는 또 어떠한가. 함께 했던 전우들이 죽고, 제대하고, 전쟁에서 발을 빼지만 크리스 카일은 이라크 전쟁에 다시 몸을 던진다. 무수한 동료들을 죽게 만든 무스타파를 죽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임무 브리핑에서 그는 당혹스럽다. 적측의 스나이퍼 무스타파를 기억하는 건 이제 그 혼자였다. 국가의 전쟁에서 무스타파란 개인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저 공병대의 담 쌓기를 방해하는 제거 대상일 뿐이다. 그 의미는 온전히 크리스 카일 개인에게만 존재한다.

무스타파는 크리스 카일과 같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하차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비전은 "무스타파는 반대쪽에 있는 크리스와 똑같은 존재이다"였다. 감독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바뀌었지만 이런 시선은 그대로 영화 안에 녹아있다.


영화는 크리스 카일이 아기를 낳아 가정을 꾸린 모습을 보이고 난 후에는 무스타파에게도 부인과 나은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크리스 카일에게 카우보이라는 꿈과 동료를 지킨다는 다짐이 있다는 걸 비추면, 무스타파에게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의 꿈과 영광의 때 그리고 지켜야할 동료가 있음을 보인다. 스필버그의 비전이 아니더라도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상대 역시 악마가 아닌 사람임을 간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전작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같은 전쟁을 서로 다른 시점에서 보여준 바 있다.

더 이상 신, 국가, 가족을 위해서란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 크리스 카일은 무스타파와의 개인의 전쟁에 나선다. 국가의 전쟁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 그에게는 무스타파를 죽이는 것 말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 동료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스나이퍼의 직무도 벗어버리고 전장으로 내려와 함께 싸우던 그가 이제 무스타파를 죽일 수만 있다면 적진 한가운데서 동료들을 몰살시킬 것이 분명한 총알을 날린다.

아마 크리스 카일의 이야기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관심을 끌었을 것은 이 지점이었을 것 같다. 오히려 애국심 같은 것은 부차적인 얘기이고, 개인이 스스로 정한 길을 온갖 오욕을 감수하면서라도 관철하는 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눈에는 이상적인 미국인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한 인터뷰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동성혼에 대해 "두 사람이 사랑해서 결혼한다는데 왜 다른 사람들이 난리야?"라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고 한다. 엄밀히 동성혼 자체에 찬성했다기보다는 개인이 선택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자유의지주의자로서의 반응이 아닐까 싶다.


미국의 건국이념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자유롭다'이다. 그 미국적 가치와 전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면 크리스 카일의 자유의지와 개인의 선택 그리고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내하며 의지를 관철해 나아가는 면에 공감했을 것 같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어쩌면 '저격수'보다는 '미국인'에 방점이 찍혀있는지도 모른다.

크리스 카일은 결국 무스타파를 죽이고 자신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 개인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는 아내에게 전화한다. 그리고 울면서 말한다. 이제 집에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마치 국가의 전쟁은 계속 되어도 자신의 전쟁은 끝났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전쟁이 끝나자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모래 폭풍이 덮친다. 이제 더 이상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구분할 수 없다. 절대 땅바닥에 총을 내려놓지 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뒤로 한 채 그는 자신의 총과 모자를 사막에 남기고 전장에서 사라진다.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 카일은 고통스런 재활 끝에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봉사 활동 중 같은 이라크 전쟁 참전 용사에게 살해당한다. 그 참전 용사는 PTSD를 앓고 있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엔딩은 죽은 크리스 카일의 실제 추모 영상이다. 전사자에 대한 추모 나팔이 흐르는 가운데 크리스 카일의 추모식이 카우보이 스타디움에서 열린다.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카우보이 크리스 카일에게 동병상련과 경의를 담아 바친 진혼곡이다.

* 본문의 내용은 게임포커스 리뷰어 Sion님이 기고하신 아메리칸 스나이퍼 리뷰를 가필, 수정한 것으로 게임포커스 편집부의 편집 방침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필자 프로필
닉네임 Sion. 영화, 서브컬쳐 칼럼니스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덕후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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