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사도(思悼). "너를 생각하며 슬퍼하노라"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죽기까지 8일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역사 소재가 아니던가?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소재를 영화화 한 이준익 감독은 오히려 이렇게 반문한다. "우리는 사도를, 그리고 그들의 가족사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렇다. 알고 있다는 비좁은 생각이 더 깊은 이해를 막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영화 '사도'는 관객들의 고정관념에 일침을 가하며, 조선 역사에 기록된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누구'의 시선으로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쓰여지곤 했다. 또, 그의 기행(奇行)들을 나열하며 '광인(狂人)'으로 묘사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설명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해 기록된 사도세자는 '흉악한 병에 걸린 광인'으로 도저히 왕이 될 수 없는, 되어서는 안 될 그릇된 존재에 불과했다. 이렇듯 사도세자는 철저히 '타인'의 관점에서 이해됐다.
그 이후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조선을 지배했던 '노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들이 제기됐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노론의 커넥션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제거'된 것이라는 전혀 다른 이해가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14년 방영됐던 '비밀의 문-의궤 살인사건'은 이런 '정치적' 이해에서부터 출발한 드라마였다. 영조와 사도세자를 정치적 라이벌로 설정하고, 그 뒤를 각각의 정치 세력이 뒷받침하는 대결 구도로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 역시 사도세자를 '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 '사도'는 정치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철저히 '가족사'에 초점을 맞췄다.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라는 영조의 선언은 곧 영화 '사도'의 선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떤 순간에도 왕이어야 했던 아버지 영조(송강호)와 단 한 순간이라도 아들이고 싶었던 세자 사도(유아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익숙한 이야기는 새로운 접근으로 인해 낯설어지고, 송강호와 유아인 등 배우들의 열연은 영화에 대한 집중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아무리 왕이라도 자기 자식인데, 너무한 감정 아닌가 싶더라. 본인도 대화나 소통을 하려는 노력은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더라. 하지만 영조가 아들을 향한 마음엔 '너만은 나처럼 되지 않고 모든 신하를 지배할 수 있는 더 강한 군주가 되길 원했다'는 바람이었을 터. 그리 생각하다보니 영조가 점점 이해가 되더라. (송강호)
어째서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여야 했던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사도'는 영조가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딜레마와 인간적인 고뇌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또, 영조와 사도세자가 한때는 살가운 부자 관계였고, 어느 지점에서부터 그들의 갈등이 시작되는지도 설명한다. 오해와 갈등이 시작되고, 점차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는 과정들이 여과없이 그려졌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탄 지경에 이르는 부자 관계를 바라보면서 깊은 탄식을 내쉴 수밖에 없다.
영화는 시작부터 비장미가 넘쳐 흐르고, 영조와 사도세자가 당기고 있는 줄은 팽팽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아들이 죽은 후에야 뒤주 앞에 선 영조의 독백을 담은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 하다. 무려 9분에 달하는 이 장면은 이준익 감독이 "송강호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신은 실패했을거다"라고 했을 만큼 실험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영조로 분한 송강호는 설득력 있는 연기를 통해 관객들을 영조의 슬픔 속으로 몰입시키고,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라는 오래된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내놓은 것 같은 느낄이랄까? 한계를 넘어버린 송강호의 연기와 이를 자신만의 색깔로 받아치는 유아인의 연기는 9분 간의 독백 장면을 빈틈없이 완성시켰다. 영화적 장치로 관객들의 감정을 격앙시키는 여타의 영화들과 달리 '사도'가 갖는 가장 큰 무기는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설득력'이다. 아버지와 아들, 왕과 세자라는 엇갈린 관계를 풀어내는 이준익 감독의 연출력은 그의 이름값을 배신하지 않는다.
다만, 소지섭이 등장하는 후반부의 약 10분은 뭔가 어정쩡한 느낌을 준다. 장년이 된 정조가 환갑을 맞은 혜경궁 홍씨 앞에서 용그림(의 의미는 영화를 통해 확인하길)이 그려진 부채를 펼치며 춤사위를 벌이는 장면인데, 이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정조는 우리가 과거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는 곧 우리가 과거와 화해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그의 말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마지막 장면을 본다면 좀 다른 느낌을 받게 될까? 그건 역시 관객의 몫이다.
글 : '버락킴' 그리고 '너의 길을 가라' 블로그 (
http://wanderingpoet.tistory.com) / 제공 : 애니포스트 (
www.any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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