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장르 : 애니메이션, 액션, 어드벤처 국가 : 미국 감독 : 바이론 하워드, 리치 무어 제작/배급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배급),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수입) 런닝타임 : 108분 등급 : 전체관람가
"누구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현실은)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랑 달라. 노래를 부른다고 꿈이 이뤄지지는 않아"
'현실'과 '이상'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또, '이상'은 '이상'과 얼마나 맞닿아 있을까?
디즈니가 야심차게 내놓은 애니메이션 영화 '주토피아'는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이상적인 문명 사회인 '주토피아(zoo+utopia의 합성어)'를 배경으로 한다.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는 육식 동물들은 자신들의 '맹수의 본능'을 제어(컨트롤)하고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초식 동물과의 공존이 가능하다. 뒤에서 '뒤집어' 생각해 볼 테지만, 이것이 과연 '이상적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어쨌거나 '주토피아'는 '공존(共存)'의 사회다. 작은 동물과 큰 동물이 어울려 살아간다. 각각의 동물들이 살아가는 작은 단위의 사회가 따로 존재하지만, 모든 동물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특별한 통역이 필요 없으므로)하며'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더불어 살아간다. 가령, 기차에는 크기가 다른 문과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작은 쥐부터 큰 기린까지, 모든 동물들을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주토피아'에는 물리적인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그곳의 구호는 평등성에 대한 지향을 보여준다. 가슴 벅차지 않은가? '누구'든 간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니! 이는 혁명적인 발상 아닌가? 그야말로 유토피아에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유토피아에서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주토피아'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얼핏 보기에 '주토피아'의 동물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한 채 살아간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자신의 위치'다. 토끼들은 '홍당무'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비버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이고, 수달의 직업은 원예사다. 반면, 사자는 도시의 시장이고, 육식 동물을 비롯해 덩치가 큰 동물들은 경찰 등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토피아'의 주인공인 토끼 주디 홉스는 경찰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부모는 '작은 동물은 경찰이 될 수 없다'며 다른 형제들처럼 홍당무 농사'나' 지으라고 설득한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끝내 경찰의 꿈을 이룬 주디는 그 이후에도 '다른 동물들로부터' 온갖 차별과 편견을 받아야만 했다.
이 지점에서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주토피아'의 구호가 갖는 허구성과 위선이 드러난다. 물론 그 비릿함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도 맞닿아 있다. 부모가 곧 신분이 되는 전근대의 계급 사회와 달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꿈'이 곧 신분이 되지 않던가? 물론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하진 않다. 금수저 · 흙수저 논란은 계층 사회로 위장된 계급 사회의 본질을 명확히 꿰뚫고 있다.
결국 '주토피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현실은)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랑 달라. 노래를 부른다고 꿈이 이뤄지지는 않아"라는 허망한 메시지다. 다만, 주디는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에 도전하고, 작은 초식동물로서 '사회적 편견'에 맞서 자신의 꿈을 성취하는 동시에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것이 '영속적인' 변화로 나아갈지는 미지수다.
나무늘보는 '주토피아' 최고의 '신스틸러'다
주디는 초월적인 의지를 지닌 특출난 영웅(적 면모를 지닌)이고, 그러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 다른 토끼들은 여전히 '주토피아'의 차별 속에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토끼 경찰관 주디와 함께 힘을 합쳐 '주토피아'에서 벌어진 연쇄 실종 사건을 해결한 여우 닉 와일드는 '여우는 교활한 사기꾼'이라는 편견을 뚫고 '주토피아'의 첫 여우 경찰관이 되지만, 그것이 예외적인 케이스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변화의 첫 걸음이라 자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금'이라도 가게 한 것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설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적 시스템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특출난 예외가 '환상'을 심어주고, 그 환상이 기득권을 보호하는 양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디즈니를 비롯한 할리우드, 미국 사회가 취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박수와 씁쓸함이 함께 따라온다.
'주토피아'를 통해 그 안에 수많은 차별(여성차별, (인)종차별)과 편견(특정 대상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을 그리면서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 디즈니의 예리한 시선은 관객들을 따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 '공포(恐怖)'를 정치에 이용하는 '정치꾼'들에 대한 풍자와 이를 무분별하게 확대재생산하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도 매우 날카로웠다.
디즈니의 55번째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는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기존의 편견을 통쾌하게 무너뜨린다.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을 비롯해 최근 제작되는 애니메이션들은 오히려 아이들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성격을 띤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들도 정치적이고 묵직하다. 실제로 '주토피아'의 경우 10대 이하의 관람 비율은 3.7%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적 속성은 큰 장점이 된다. (어린아이를 포함한) 폭넓은 세대에게 소비되기 때문에 그만큼 파급력도 크다.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아이들은 더욱 다양한 '물음표'를 찾아낼 것이다. 또, 어른들 역시 좀더 '말랑'하게 사회적 고민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기에 부담이 없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서론에서 언급했던 '의문'에 대해 언급하고 글을 마치도록 하자.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과연 '이상적'인 걸까?. 물론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가능한 상상이지만, 그것이 '평화'에 대한 인간의 '편견'은 아닐까? 오히려 자신들의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생태계적인 관점의 '평화'가 아닐까?
앞선 글들에서도 지속적으로 언급했던 것처럼 '좋은' 콘텐츠는 단순히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공명(共鳴)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토피아'와의 공명을 통해 더 많은, 더 다양한 고민들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 고민들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작은 씨앗'들이 되길 희망한다.
글 제공 :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의 블로그(
http://wanderingpoet.tistory.com)
* 본문의 내용은 게임포커스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