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달리 게임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은 덜 무겁다. 당연하게도 현실에서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지만, 적어도 게임에서는 동전을 넣는 등 시스템과 모종의 거래(?)를 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패널티는 있지만, 모든 것의 끝이라는 절망적인 결말보다는 훨씬 낫다.
게임에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패널티는 암묵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일반적인 RPG 뿐만 아니라 FPS, AOS 등 대부분의 장르에서는 캐릭터가 죽더라도 곧 되살아나고, 그대로 게임을 이어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유저가 느낄 상실감을 최소화하고 난이도를 낮춰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1980년 출시된 '로그(Rogue)'는 죽음에 대한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게임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볼품없지만, 특유의 높은 난이도와 랜덤 요소들은 게임을 반복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물론 정통파로 분류되는 '로그라이크' 게임들은 특유의 높은 진입장벽과 이질감 때문에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단 하나의 목숨과 랜덤으로 생성되는 각종 던전 및 요소 등 '로그'의 핵심 요소를 몇 가지만 가져와 상대적으로 가벼워진 '로그라이트' 게임들은 쉽게 접할 수 있다. 아마도 '아이작의 번제'나 '크립트 오브 더 네크로댄서', '다키스트 던전' 등의 유명한 게임들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라 생각한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Slay the Spire)' 또한 '로그라이크'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게임이다. 게임 내의 많은 요소들은 랜덤성이 가미되어 있고, 던전을 진행하다가 캐릭터가 죽게 된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로그라이크'의 정체성이 살아있는 카드 게임
게임은 기본적으로 던전을 탐험하는 RPG의 특징과 덱 빌딩 카드 게임을 잘 섞어 놓았다. 일반적인 RPG처럼 캐릭터의 레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직업을 선택하고 매 턴마다 주어지는 자원으로 카드를 사용하면서 던전을 돌파하는 콘셉트의 게임이다. 흔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같은 '로그라이크' 장르의 RPG '다키스트 던전'과 블리자드의 '하스스톤'을 섞어놓은 것 같다는 의미에서 '다키스톤'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앞서도 적었듯이 '로그라이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바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랜덤성이다. 이 특징들 때문에 '로그라이크'는 높은 진입장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로그라이크'의 정체성은 해치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게임이 어려워지지 않도록 각종 요소를 통해 밸런스를 잘 잡아냈다.
물론 '슬레이 더 스파이어'에서도 던전을 진행하다가 캐릭터가 쓰러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한다. 획득했거나 강화한 카드들도 모두 사라지고, 유물도 마찬가지다. 다만 첫 번째 단계에서 보스를 처치하면 다음 도전 때는 약간의 혜택을 받고 시작할 수 있으니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몬스터가 등장하는 순서는 플레이를 반복 하다 보면 느껴질 정도로 어느 정도 정형화 되어 있지만, '물음표'를 선택했을 때 어떤 이벤트가 발생할 지는 랜덤이다. 보상으로 얻는 카드와 유물 또한 완전히 랜덤이다. 그러나 '슬레이 더 스파이어'에서는 랜덤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납득 가능한 랜덤성과 전략적 선택
지나치게 어렵지도, 또 너무 쉽지도 않은 밸런스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플레이어가 게임 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점이 있다. 매 턴마다 카드가 덱에서 섞여 핸드로 들어올 때 어떤 카드가 잡힐지는 알 수 없지만, 덱에서 불필요한 카드를 제거하거나 보상으로 주는 카드를 받지 않고 넘겨 '압축'해 랜덤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매 턴마다 기본적으로 5장씩 핸드에 들어오고, 어떤 카드가 남았는지 언제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박치기' 같은 일부 카드들은 다음에 드로우할 카드를 정해 맨 앞에 둘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맵을 살펴보면서 상황에 따라 엘리트와 싸울지, 물음표에 도전할지, 화톳불에서 휴식을 취할지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점도 '황금 밸런스'에 힘을 더한다. 전체 던전의 맵을 통해 '큰 그림'을 그리고 계획에 맞춰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예상 외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전투 상황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플레이어의 실수로 인공물에 부정적 효과가 막히는 경우는 있어도 '다키스트 던전'처럼 빗나가는 경우는 없으며, 시간 제한이 없어 '하스스톤'처럼 한 턴 내에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기 위한 전략을 마음껏 고민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슬레이 더 스파이어'에 존재하는 랜덤 요소들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하다. '사일런트'의 '탄성 플라스크' 카드나 '아이언크라드'의 '절대적인 힘' 카드처럼 타겟이 랜덤으로 적용되는 카드도 일부 있지만 그 비중은 크지 않아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던전을 헤쳐나가는 재미
던전을 진행하면서 나오는 유물과 카드는 완전히 랜덤이다. 하지만 첫 번째 스테이지의 막바지쯤 들어서면 어느 정도 덱 컨셉의 윤곽이 잡히게 되고, 게임 진행을 원활하게 해주는 유물도 몇 개 정도 획득한 상태가 된다.
마치 '하스스톤'에서 직업마다 컨셉에 맞춘 덱들이 존재하듯이, '슬레이 더 스파이어' 또한 매 판마다 나오는 카드와 유물로 컨셉덱을 꾸려 즐길 수 있다. 이를 테면 '표본' 유물과 '맹독 부여', '탄성 플라스크', '촉매' 등을 갖추고 방어적인 카드들과 조합해 중독 도적으로 플레이 할 수도 있고, '악마화'와 '발화', '약점 분석' 등의 카드로 힘을 누적시켜 강력한 대미지로 적을 분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카드의 종류와 효과가 다양한 만큼,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덱을 맞춰 나가는 재미는 매우 쏠쏠하다. 효과가 다양하다고 해서 복잡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스스톤'의 진입장벽이 높은 이유 중에 하나로 언급되는 복잡한 카드 효과들은 '슬레이 더 스파이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직관적이고 이해하기도 쉬우며, 카드를 하나하나 사용하면서 조합하는 재미 또한 살아있다.
게임을 반복하게 하는 '로그라이크'의 힘
게임 내 대부분의 요소들은 랜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납득이 가능하도록 완화 장치를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진입장벽과 불합리는 존재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불합리는 게임을 반복하게 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전투에서 아쉽게 패배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다음엔 어떤 덱으로 도전해볼까?'하게 만드는 것이다.
뛰어난 전략성 또한 게임을 반복하게 하는 요소다. 위기의 순간 완벽한 순서로 카드를 사용하고 보스를 잡아내는 짜릿함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잘 굴러가는 덱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딱 맞아 떨어지는 보도 블록을 봤을 때와 같은 만족감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플레이 할수록 해금되는 각종 카드들도 마찬가지다. 매 판이 끝났을 때 성적에 따라 경험치를 받고, 레벨이 오르면 신규 카드가 해금된다. 새로운 카드의 성능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이를 활용한 덱을 짜는 재미는 '하스스톤'에 견줄 만하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명작 로그라이크 카드 게임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로그라이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와 카드 게임의 뛰어난 전략성 등 장점만을 가져와 잘 버무린 완성도 높은 게임이다. '로그라이크' 장르라면 죽고 못사는 팬이거나 '하스스톤'을 즐겨 했던 유저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내가 이번 턴에 어떤 카드를 사용했는지 보여주는 UI가 없는 등 몇 가지 매우 사소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직업 및 카드 밸런스와 적절한 난이도 그리고 '로그라이크' 장르가 가진 특유의 재미가 합쳐져 단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다만 아직 정식으로 출시된 것이 아닌 얼리억세스 게임인 만큼 불안 요소도 있다. 이러한 불안함은 얼리억세스로 게임을 개발하는 도중 중단되는 사례가 종종 있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한국어를 비롯해 적극적으로 로컬라이징을 진행하고 있고 게임 자체가 매우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는 만큼, 이후 출시될 정식 버전의 완성도와 개발사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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