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와 게임의 이색적인 만남을 위해 정부와 게임 업계, 그리고 학계가 뭉쳤다.
게임인재단이 주최 및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 경기콘텐츠진흥원,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후원하는 '게임인 한국사 콘서트'가 23일 판교 경기창조혁신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한국사와 게임의 융합을 통해 한국사를 활용한 게임 개발을 활성화하고 우리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행사에는 ‘임진록’, ‘거상’, ‘광개도태왕’ 등 한국사를 다룬 게임들을 개발하며 국내 역사 게임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조이시티 김태곤 CTO, 학생들에게 ‘큰별쌤’이란 별명으로 더 익숙한 최태성 한국사 강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이번 행사를 주최 및 주관한 게임인재단의 정석원 사무국장 등이 참석해 국내 게임 산업 발전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더불어 본 행사에 앞서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렵 100주년 관련 3D 프린팅 체험 시연과 문화재청의 문화유산 3D 프린팅 전시, 체험 교육 등도 함께 진행되어 참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석원 사무국장 “교육용 게임을 넘어선 ‘PLAY 한국사’ 게임 등장하길 바라”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게임인재단 정석원 사무국장이 자리에 올라 ‘게임인 한국사 콘서트 길라잡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행사 개요를 발표했다.
1,700만 명이라는 관람객을 기록한 영화 ‘명량’이 보여주듯이 한국사는 영상물로는 매우 친숙한 콘텐츠이며 이미 역사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다. 해외에서는 ‘어쌔신 크리드’나 ‘문명’ 등의 세계 역사를 바탕으로 한 게임들이 오랜 기간 사랑받아왔다.
정석원 사무국장은 “게임인재단은 ‘왜 단순한 교육용 게임이 아닌 한국사의 재미를 다룬 게임은 없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라며 “오늘 행사의 핵심은 ‘PLAY 한국사’다. 한국사를 통해 선조들이 살아온 이야기와 교훈을 배울 수 있는 만큼, 모두가 즐기는 게임을 통해 한국사를 접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라고 전했다.
최태성 강사 “한국적인 요소를 게임에 접목한다면 연령층과 영역 확대될 것”
이어 최태성 강사가 자리에 올라 한국사의 대중화에 대한 강연을 진행했다. 최태성 강사는 다양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사례로 들어 게임으로 만들기 좋은 콘텐츠로 소개했다.
최태성 강사는 “경제가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문화와 콘텐츠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문화와 콘텐츠가 새로운 ‘먹거리’가 되기 때문이다”라며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상상력들을 기반으로 한 창작 요소들이 많이 있다”고 전했다.
최 강사가 첫 번째로 소개한 역사 콘텐츠는 ‘문명’이다. 축구 국가대표팀 응원단을 상징하는 붉은악마 ‘치우’는 독특한 외모와 ‘풍백’, ‘우사’를 데리고 다니는 가상의 인물로, 이 캐릭터를 게임에서 다룬다면 재미있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학계에서 주류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게임은 상상의 영역이다”라며 “환단고기’와 같은 책은 위작으로 볼 만큼 역사학계에서 단군 이전의 시기를 금단의 영역으로 본다. 개인적으로 '환단고기'는 인정하지는 않지만, 게임으로 만들었을 때 재미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학계가 다루기 어려워하는 것을 게임을 통해 마음껏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역사 콘텐츠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간의 싸움을 다룬 ‘전쟁’이다. 최 강사의 설명에 따르면 고구려는 철갑기마병을 내세운 강력한 육군을 보유했고, 백제는 일본과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와 몽골 등과 교류하는 등 강력한 해상 세력으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군사력은 다소 떨어졌지만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등 신라만의 전략과 전술이 강점이다. 이러한 국가별 특징을 활용해 우리나라만의 ‘삼국지’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 강사는 조선시대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의 지리적 특징을 활용한 게임, 과거 서당에 다니던 아이들이 즐겨 하던 ‘승경도’를 현대에 맞게 개량한 보드게임, 일제강점기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 독립투사들의 활약을 다룬 게임 등도 제안했다.
최 강사는 “최근 한국사는 대중에게 ‘핫’하다. 한국적인 요소들을 과감히 게임에 끌어들인다면 게임의 영역과 연령층도 확산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멋진 한국사, ‘PLAY 한국사’를 기대하겠다”라고 전했다.
김태곤 CTO의 '역사 게임 A to Z'
이어 조이시티의 김태곤 CTO가 자리에 올라 그 동안 국내 게임업계에서 시도했던 한국사 기반 게임의 사례들을 살펴보고 향후 계획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태곤 CTO는 임진왜란 이후 백성들이 억울한 마음에 전쟁을 각색해 해피엔딩으로 만든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온 ‘충무공전’으로 게임으로 업계에 입문했다. ‘충무공전’은 1996년도에 처음 출시돼 미국과 독일 등에 수출되기도 했으며, 이후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을 다룬 RTS 게임 ‘임진록’ 시리즈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조선의 반격’ 시리즈의 커버를 장식한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는 남해안 지역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짧은 일화도 소개했다.
김 CTO는 “남해안 지방의 넓은 지역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과 사업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미지는 ‘조선의 반격’에서 쓰인 이미지 이후엔 변화가 없었다”라며 “개발자로서 많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우리 것에 대한 준비가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씁쓸한 일이다”라고 전했다.
김 CTO는 ‘임진록’ 시리즈 이후에도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천년의 신화’를 개발하면서 역사 게임에 대한 경험을 축적해 나갔지만 한계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동안 임진왜란, 즉 전쟁이 중심이 되는 게임들만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이 아닌 경제와 거래가 중심이 되는 온라인게임 ‘거상’을 만들었고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또 2004년에는 정치가 핵심 시스템인 ‘군주’로 온라인게임이라는 하나의 작은 사회에서 자율적 정치 체제가 가능한지 시도하는 등 다방면으로 역사 게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한계에 부딪혔다. 당시 국내 게임들은 해외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지는 못했고, 역사 게임을 개발하는 입장에서 개발 시간과 인력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국내 시장만 바라보고 게임을 개발하는 것은 위험한 상황이었던 만큼 대안이 필요했다. 이에 김태곤 CTO는 신라의 장보고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을 다룬 게임도 글로벌에 선보이면서 해외 진출의 싹을 띄웠다.
한국사와 게임의 접목, 묘사와 역사적 고증 중요해
이어 김태곤 CTO는 그 동안 역사 기반의 게임들을 선보이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사업적 부담이 큰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사와 게임을 성공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과 향후 계획을 소개했다.
그는 먼저 역사 게임에서의 묘사에 대해 언급했다. 일반적으로 역사를 다룬 게임에서는 선악과 피아 구분을 명확히 하고 적을 한 등급 아래, 즉 극단적으로 묘사했다. 반면 우리 편은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인물로 묘사되곤 했다.
이에 대해 김 CTO는 “적에 대한 존중이 반드시 필요하다. ‘명량’에 등장한 일본 장군들은 주연급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호평을 받았다”라며 “우리의 안목은 20년 전과는 분명 차이가 있으며, 상대방 또한 충분히 매력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역사적 고증이다. 상상력을 부여하는 융통성은 필요하지만, 적절한 경계선이 어디인지 찾아가는 실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한편, 김태곤 CTO는 현장에서 역사 기반의 모바일게임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이 게임은 지도를 기반으로 역사적 현장에서 AR을 활용해 현장에서 직접 있었던 과거 일을 체험해볼 수 있는 게임이다.
마지막으로 김태곤 CTO는 “역사를 게임에 녹여내고 IP를 자산화 해서 해외에 진출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라며 “유저 분들의 사랑과 격려가 필요하며, 게임업계의 다양한 시도가 오늘 행사를 계기로 시작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역사적 고증’은 몰입하게 하는 장치
최태성 강사와 김태곤 CTO의 발표에 이어,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좌장을 맡은 가운데 자유롭게 발언을 이어가는 토크 콘서트도 진행됐다.
김태곤 CTO는 “누군가의 취미 생활이나 소규모 산업이라면 아이디어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지겠지만, 게임 산업이라는 것이 매우 대규모이고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아이디어의 비전이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라며 “변명이고 비겁한 말이긴 하지만,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이를 해결하는 것도 개발자들에게 숙제다”라고 전했다.
이어 김 CTO는 “역사 게임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성숙해 진다면 영화 등의 문화 콘텐츠들에서 다뤄진 것들이 게임에서도 다뤄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한다”라며 “토대를 굳건하게 만들고 역사 콘텐츠만으로 업계에서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자연스럽게 역량 있는 사람들이 모일 것이며, 진정한 콘텐츠의 완숙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외에 최태성 강사는 이러한 역사와 게임의 융화를 위해 문화재청 등 정부 부처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업을 주문했다. 그는 “역사와 게임의 융합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토대가 갖춰져야 할 것”이라며 ”우리 문화만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들과의 공감대도 끌어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앞서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고증 문제에 대해서도 토론이 이어졌다. 김태곤 CTO는 전쟁 영화에 등장하는 군인들의 사단 마크가 잘못되어 있으면 소비층의 지적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며, 디테일을 중시하는 소비자층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고증의 수준 또한 올라간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가상의 이야기(게임, 영화 등)에서 몰입감을 주기 위해서는 사실성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고증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반면 최태성 강사는 역사적인 고증을 지나치게 요구한다면 창작에 제한이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전했으며, 상상에 어느 정도는 맡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김태곤 CTO는 “흔히 우리가 접하는 연표 식의 역사가 아닌,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에 포인트를 두어야 할 것”이라며 “한국사를 활용한 게임 중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포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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