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2000년 선보인 '언브레이커블'은 시대를 앞서간 영화였다. 슈퍼 히어로와 안티 히어로의 이야기를 다루며 히어로와 빌런의 관계성에 대한 고찰, 초인적인 힘을 자아내는 건 인간의 '믿음'이라는 그의 평생의 철학이 담긴 영화였다.
언브레이커블은 마블 히어로들이 친숙한 존재가 된 10년, 아니 5년만 뒤에 나왔다면 흥행과 평가 면에서 전혀 다른 위치에 놓였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 왔다.
그리고 긴 텀을 두고 나온 '23 아이덴티티'. 23개의 다중인격을 가진 케빈이 24번째 인격의 지시로 소녀들을 납치하며 벌어지는 스릴러였던 이 영화가 결국 언브레이커블 세계와 이어진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언브레이커블의 던과 미스터 글래스, 그리고 23 아이덴티티의 케빈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예고와 함께 나온 글래스는 기자에게 올해 상반기 최대 기대작이었다. '어벤져스' 신작도 기대되지만 그보다 더 샤말란이 보여줄 새로운 이야기, 그리고 그가 내린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 그리고 슈퍼 히어로가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결론이 보고 싶었다.
결론부터 적자면, '글래스'는 기자의 긴 기다림과 큰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 준 멋진 작품이었다. 작중 벌어지는 심리전, 그리고 (슈퍼맨과 아이언맨이 친숙한 관객들에게는 볼품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클라이막스의 1대1 대결에 긴장하고 감탄하며 영화를 감상했다.
주변의 샤말란 팬들, 그리고 언브레이커블과 23 아이덴티티를 좋게 본 친구들에게는 '글래스'를 강력히 추천했다. 히어로와 빌런의 존재가 너무 친숙해진 이 시대에 샤말란이 보여준 '글래스'의 이야기, 히어로는 어떻게 힘을 얻는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훌륭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들, 샤말란 작품과 친하지 않은 관객들, 언브레이커블과 23 아이덴티티를 보지 못한 관객에게 이 영화를 권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전작들을 모두 봤다는 전제 하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설명에 너무 부족하다. 샤말란이 '식스센스'와 '샤인', '언브레이커블'까지 초현실에 대한 믿음을 설파한 작품들을 보지 않았다면 작품의 테마와 샤말란의 웅변이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글래스'는 이런 부분이 너무 확연히 눈에 띄는 영화이기도 했다.
기자는 그래도 '글래스'는 영화팬이라면, 슈퍼 히어로를 다룬 영화들을 봐 왔다면 한번쯤 봐 두면 좋겠다고 조용하게 권하고 싶다. '글래스'를 보고 나서 샤말란 영화들을 찾아보게 된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고, 보고 '뭔 소리야' 싶더라도 봐 두고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다시 생각이 나고 한번 더 찾아보게 될 영화가 '글래스'인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제나 초현실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해 온 샤말란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는 비교적 단조롭게 결론을 냈다. 다음 이야기가 또 가능할 것 같지만, 더 이상의 사족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국내에서 160만 관객을 동원한 23 아이덴티티보다는 좋은 성적을 낼 것 같지만, 스크린에 그렇게 오래 걸려있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관심있는 분들은 서둘러 극장을 찾아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기자도 한번 더 가서 놓친 부분이 없나 유심히 살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