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혁명가 '스티브 잡스'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등록일 2011년10월07일 16시15분 트위터로 보내기



혁신의 상징으로 불리며 전 세계 IT업계의 한 축을 이끌어 왔던 스티브잡스(Steven Paul Jobs, 56세)의 사망 소식에 전 세계 각계각층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시대의 아이콘', '프레젠테이션의 대가', '가장 성공한 최고 경영자(CEO)'등 화려한 수식만큼이나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의 인생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에 게임 포커스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혁명을 불러 일으키며 게임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친 스티브잡스의 과거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실리콘 벨리에서의 운명적 만남
어린시절 대학원생 미국인 어머니와 무슬림 이민자 사이에서 태어난 스티브잡스(이하 잡스)는 집안의 반대로 태어난지 1주일 만에 대학원생이었던 어머니에 의해 캘리포니아에 실리콘벨리에 거주하고 있던 폴/클라라 잡스 부부들에게 입양되었다. 지금의 스티브잡스라는 이름은 양부모로부터 받은 것.

잡스는 자신을 키워준 폴/클라라 잡스 부부를 유일한 부모로 여겼다.

유년 시절의 잡스는 학교를 자주빼먹는 비행 청소년이었지만 학교 생활을 하면서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통해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이해했으며 이후 고등학교 시절에는 팔로 알토의 휴렛 패커드(HP)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다.

스티브잡스의 공동 설립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우)

이때 잡스는 그가 살던 실리콘벨리의 동네형이었던 스티브 워즈니악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전자제품에 소질을 보인 그들은 이후 방학 기간을 통해 휴렛 패커드사에 임시 채용되기도 했다.

잡스는 이후 리드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경제적 여건을 이유로 중퇴를 결심하게 되고 중퇴 이후에도 약 2년여 동안 학교에 머무르면서 수업을 들었으며 현재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타이포그래피 수업에 심취하게 된다.

젊은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1976년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공동으로 애플 컴퓨터를 창립했으며 이후 워즈니악이 개발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1을 공개한다.

애플1의 판매 성공으로 4년 뒤인 1980년, 애플 컴퓨터는 주식을 공개하게 되고 잡스는 20대 억만장자 대열에 오르게 된다. 이후 4년 뒤에는 경쟁사였던 IBM을 겨냥한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애플 리사를 출시했지만 경쟁사에 비해 높은 가격과 응용프로그램 부족으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투자자였던 존스컬리에 의해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1985년, 본인이 세운 애플에서 쫒겨나기도 했다.

자신의 능력을 재 검증한 CEO
이후 잡스는 넥스트사를 세워 유닉스 계통의 세계 최초의 객체 지향 운영 체제이자 훗날 윈도우와 맥 오에스의 등장에 밑거름이 된 넥스트 스텝을 개발하였고 1년 뒤인 1986년 스타워즈 사단인 루카스 필름을 인수하며 훗날 회사 명칭을 픽사로 개명, 10년 간 6천만 달러를 투자하기에 이른다.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 중 하나인 픽사는 현재 디즈니에 인수되었다

애플을 떠난 잡스의 사업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루카스필름을 인수 후 만년 적자에 시달림을 받았고 파산 위기에 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영화인 '틴토이'와 '토이스토리'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서 결국 픽사를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냈다.

한편, 잡스가 없는 애플은 고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애플은 제품의 흥행 실패와 경영방식의 문제로 점점 하향세를 걸었고 결국 잡스가 있던 넥스트를 애플이 인수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애플에 화려하게 복귀를 선언, 그 해 7월 애플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오르게 됐다.다.

잡스가 평생 정신적 스승으로 의지한 일본 선불교 승려 코분치노 오토가와, 2002년 사망

히후 잡스는 인수 합병 이후 약 10억 달러의 적자에 허덕이던 애플을 단 한 해 만에 4억 달러에 가까운 흑자 회사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능력 검증에 성공하게 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경영자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당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연봉 1달러 정책' 역시 그가 애플이라는 기업에 가진 애정과 열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으며 이후 아이맥, MP 재생기였던 아이팟을 연이어 성공시키면서 다시 한 번 성공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성공의 이면에 가려진 그의 단점 역시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혁신적이었던 애플의 신제품 출시와 관련해 그는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한 적이 없었으며, 항상 다른 누군가의 공로를 가로채다시피 했다'는 도덕적인 구설수에 오른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CEO보다는 개발자의 입장에서 두 가지 일을 모두 이해하고 자신의 제품을 더 좋게 보이기 위해 만드는 노력과 미래를 생각하는 창조적인 두뇌만큼은 다른 누군가의 공로가 아닌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었다.

이후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연이은 성공신화를 이루며 세상을 바꿨던 잡스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2011년 6월 WWDC 2011이후 최고 경영자 자리에서 사임했으며 이후 약 4개월 만인 10월 5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영면했다.

그의 트래이드 아이콘이었던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는 이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게임 환경까지 바꾼 천재
iOS운영체제를 가진 모바일 기기인 아이팟 터치,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스마트 사업은 게임 산업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잡스는 앱스토어를 통해 PC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던 모바일 게임 시장을 활성화 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PC와의 격차를 줄인 스마트기기들의 등장으로 게임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바꾸는데 성공한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한번 쯤 들어보았던 앵그리버드

적은 비용으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모바일 플랫폼은 이후 게임 업계의 새로운 비지니스 모델로 각광받게 되고 신생 개발사들이 '앵그리버드'와 같은 게임을 세계적으로 성공시키면서 게임 플랫폼의 다변화를 주도하였으며 게임 업계의 전반적인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네트워크 기술이 발달로 게임과 SNS(Social Networks Service)를 하나로 합친 SNG(Social Networks Game)가 탄생하게 되고 이는 스마트 기기의 또 다른 블루오션으로 떠오르며 많은 업계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태플릿 PC는 이제 노트북과의 경계도 허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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