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국내 게임업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소통'이었다. 게임사의 사옥 앞으로 트럭을 보내며 이용자들이 겪은 부당함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트럭 시위'가 일어났고, 이용자들을 초청해 개발자들과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간담회도 열렸다. 적극적인 의견 개진과 피드백 그리고 이용자로서의 정당한 요구는 이전까지 관성적으로 이어져 오던 게임업계의 '일방통행 운영'을 크게 바꿔놓았다.
라이브 방송과 쇼케이스라는 형태의 소통도 이러한 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이전에는 인터뷰에서나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리더급 개발자들, 각 개발사의 대표들이 방송에 출연하는 모습은 이제 전혀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 내용 또한 단순히 출연해 업데이트나 개발 비화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코스프레, 퀴즈쇼 진행, 먹방, 버미육(バ美肉) 버튜버, 옛날 예능 패러디 방송까지. 오죽하면 이용자들 사이에서조차 '개발자 난이도가 너무 높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반응이 나올까 싶다.
하지만 게임사들의 소통에도 매너리즘이 온 것 아니냐는 냉정한 지적도 일각에서 나온다. 라이브가 아닌 녹화 방송으로 진행돼 형태만 달라졌을 뿐 일방통행인 것은 여전하다거나, 말 뿐인 형식적인 사과와 '검토해 보겠다'는 비즈니스 적인 공허한 약속만 이루어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이제는 단순히 방송을 자주 하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PV를 틀거나 업데이트 될 내용이 담긴 개발자 노트를 국어책 읽듯 읽기만 하는 형식적인 소통만으로는 진정성을 인정 받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이제 이용자들과 시장은 게임사들에게 묻고 있다. "그래서 소통을 하고 무엇을 바꾸었는가?"
소통이 재편한 게임 산업의 지형, 핵심은 '신뢰 자본'의 규모
일방통행에서 쌍방향으로의 전환, 그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는 업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2026년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이제 소통은 이용자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일회성 마케팅 수단을 넘어, 게임의 PLC를 좌우하고 기업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핵심 전략이자 신뢰라는 이름의 새로운 자산으로 진화해야 한다. 신뢰는 재무제표에 숫자로 기록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도 힘이 되어줄,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위기론이 나오는 요즘 시대에서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하는 핵심 자산이 될 수 있다.
게임 서비스 중 발생하는 사건 사고는 필연적이다. 여기서 이용자들이 바라는 것은 사건 사고의 재발 방지, 향후 대응 방법, 진정성이 담긴 사과 등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비슷한 사건 사고가 나오더라도 이에 대한 반응이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차이는 그동안 게임사가 쌓아온 '신뢰 자본'의 규모에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엔씨소프트 '아이온2', 관성과의 결별과 이미지의 대전환
소통에 진정성과 간절함, 변화하려는 의지를 담는다면 손실 회피를 넘어 가치 창출로 이어지도록 할 수도 있다. 오히려 위기를 '역전의 기회'로 만드는 모멘텀을 제공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최근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엔씨소프트의 '아이온2'다.
엔씨소프트는 이용자들 사이에서 여러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기업이었다. 특히 무거운 과금 정책과 '리니지라이크'라는 장르 분류의 원조격으로 일컬어지며 '혁신 없는 게임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아이온2'의 출시 이후, 기존 이미지와는 정반대되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려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초기만 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이용자들도 개발진의 지속적인 개발 방향 공유와 게임 내외의 이슈에 대한 명확한 피드백을 이어 나가는 진솔한 모습에 호응으로 화답했다.
특히 엔씨소프트 김남준 PD는 "'아이온2'가 잘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이용자들에게 믿음을 드려야 이후 출시될 다른 게임들에 대한 믿음도 가져주실 수 있겠다라는 사명감이 있다”고 밝히며, 달라진 기조와 책임감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단순한 개발 과정 공유가 아니라 "왜 이 게임이 이전과 달라야 하는가"에 대한 디렉터의 진솔한 메시지는 이용자들의 냉소를 호응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널리 퍼져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행보, 진정성을 담은 꾸준한 소통이 이용자들에게 '기대할 만한 가치'로 다가간 것이다.
면피성의 사과나 변명 일색인 소통이 아니라, 부정적인 여론을 피하지 않고 곧바로 수용 및 개선하고 이용자들을 설득하려 노력하는 태도가 기업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가장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다.
넥슨 '블루 아카이브', '개발트리아'의 '진심'이 만든 이용자와의 정서적 유대감
넥슨게임즈가 개발한 '블루 아카이브' 또한 신뢰의 자산화를 설명하기에 훌륭한 사례다.
'블루 아카이브'의 개발진은 자신들이 이용자들 만큼이나 게임의 가장 열렬한 팬임을 증명함으로써 이용자들과의 독보적인 신뢰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블루 아카이브'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개발자와 이용자들 사이에 만들어진 강력한 정서적 유대감은 게임의 안정적인 서비스와 활발한 2차 창작으로 연결되며 이 게임만의 강력한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
'블루 아카이브'의 정기 생방송 '키보토스 라이브'는 일견 단순한 업데이트 소개 방송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키보토스 라이브'의 진정한 가치는 '개발자 코멘터리' 코너에서 드러난다. '개발자 코멘터리'는 주요 개발진들이 참석해 각 파트 별로 개발 비화를 소개하는 코너로, 일반적인 이용자들이 볼 수 없는 내부 자료를 보거나 기획 의도를 들을 수 있어 이용자들의 호응이 크다.
그런데 이 '개발자 코멘터리'에서 소개되는 자료들의 내용이 범상치 않다. 개발진은 다소 낯부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표현도 서슴지 않고 컨셉 아트, 내부 시안, 캐릭터 설정 비화 등 외부에 쉽게 공개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가감 없이 공유하며 얼마나 '진심'인지를 어필해왔다.
단순히 개발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이 게임을 만들때 얼마나 깊게 고민하고 팬심을 담았는가"를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들은, 이용자들로 하여금 동질감을 느끼도록 하고 '설명을 듣는다'가 아니라 '같이 보고 있다'는 긍정적인 인상을 남긴다.
김용하 EPD가 일본의 '코믹마켓'을 포함해 여러 국내외 행사에 적극 참여하며 현장에서 이용자들과의 독보적인 신뢰 관계를 만든 점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서브컬처는 타 장르에 비해 개발진과 이용자층의 거리가 가까운 장르라고 생각한다며, 게임을 개발하는 입장에서도 '팬의 마음'으로 즐기며 만들어 가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2026년, 게임사들의 '신뢰 통장' 잔고는 얼마인가
'아이온2'와 '블루 아카이브' 두 사례의 공통점은 단순한 정보 공유를 넘어 이용자들의 마음 깊숙한 정서를 건드렸다는 데 있다. 개발진이 게임에 진심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때 유저들의 냉소나 의심의 눈초리는 호응과 지지로 바뀐다. 이는 곧 게임 서비스의 강력한 지지 기반으로 '자산화'될 수 있다.
이제 게임사의 경쟁력은 보유한 IP의 가치, 매출, 실적, DAU와 MAU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 IP를 지탱하고 있는 이용자들과의 '신뢰 자산' 규모가 곧 기업의 가치가 되는 시대다. 소통을 귀찮은 숙제나 마케팅용 쇼로 치부했던 기업들은 이용자들의 높아진 눈높이와 안목, 그리고 의심을 버텨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제 국내 게임사들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우리는 이용자들과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에게 남은 신뢰 자산은 얼마인가?"
진정한 소통은 게임사와 이용자가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신뢰는 어떤 기술적 혁신보다도 강력한 생존을 위한 무기다. 소통은 곧 단순한 게임의 업데이트 내역의 나열이나 면피성 사과가 아니라, 게임을 만드는 이들과 즐기는 이들 사이의 '단단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신뢰라는 자산을 쌓아가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2026년,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게임사는 가장 많은 말을 한 회사가 아니라 말한 내용이 결과로 검증될 수 있도록 준비된 회사일 것이다. 소통이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제 대본의 분량보다 얼마나 진심을 담았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게임업계에서 소통이라는 키워드가 부각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러한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게임사야 말로 오래도록 사랑받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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