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앨범2' 라는 게임이 있다. 캐릭터들의 심리적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한 걸작 연애게임으로 PC판이 먼저 나온 후 2012년에는 플레이스테이션3, 이어서 PS Vita판도 출시되어 호평받은 작품이다. 한때 국내 퍼블리셔가 한국어화 출시를 추진한 적도 있지만 아쿠아플러스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아 무산되어 관계자는 물론 기자도 매우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이 게임의 시나리오라이터는 인기 소설 '시원찮은 그녀를 위한 육성방법'으로 국내에도 팬이 많은 마루토 후미아키로, 그는 화이트앨범2의 기획을 개발사에 직접 제안해 걸작으로 빚어낸 후에는 소설가로서도 크게 성공해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소설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마루토 후미아키를 응원하고 있지만('시원찮은 그녀를 위한 육성방법' 극장판이 국내 개봉 중이니 아직 안 보신 분은 극장으로 달려가시기 바란다) 게이머로서는 화이트앨범2를 마지막으로 00년대를 대표하는 텍스트게임 장르 시나리오라이터였던 그가 참여한 게임을 만나볼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마루토 후미아키 뿐만 아니라 00년대부터 10년대 초반까지 멋진 작품들을 게이머들에게 전해주던 일본의 시나리오라이터들 중 여전히 게임쪽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상상력을 발휘한 트릭, 다른 세계, 전문지식을 활용한 흥미로운 스토리는 요즘도 간혹 볼 수 있지만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한 작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텍스트 어드벤쳐 장르 팬으로서 아쉬울 따름이다.
그건 그렇고, 기자는 사전 정보 없이 게임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텍스트 어드벤쳐 장르는 콘솔로 이식되는 경우 어느 정도 검증된 작품이라는 판단 하에 나오는 게임을 대부분 구입하는 편이다. 실망하는 경우도 많지만 지난해 소개한 '최악의 재액인간에게 바친다'처럼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경험도 있어 구입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데...
간만에 또 하나의 보석같은 게임을 발견했기에 소개하려 한다. 2019년 9월 일본에 출시된 '삼색회연'(三色絵恋-TRICOLOUR LOVESTORY)이라는 작품으로, 2017년 스팀으로 중국어 음성과 중국어, 영어 자막으로 출시된 중국게임이다. 중국 '야마유리'에서 개발해 스팀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2년이 지나 일본에 출시된 것.
삼색회연을 플레이해 보면, 일본판도 새로 더빙을 하지 않고 중국어 음성을 그대로 수록하고 일본어 자막을 붙였다. 중국어 자막도 동시에 지원해 자막을 2개 띄워놓고 플레이할 수 있다.
사실 구입할 때에는 아무 정보 없이 구입했던 탓에 게임을 실행하고 중국어 음성이 나올 때에는 깜짝 놀랐다. 캐릭터는 평소 플레이한 일본 미소녀게임 캐릭터라고 해도 그렇게 믿을 법한 캐릭터들인데 이들이 살아가는 곳은 중국(2005년이 배경이다)의 후베이성이며, 당연히 중국어로 이야기한다.
교실에 걸려있는 오성홍기가 '여기는 일본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중국 개발사의 미소녀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하는 것은 처음이라 흥미가 생겨 읽어나가다 보니 3일에 걸쳐 100만자가 넘는 삼색회연의 시나리오를 끝까지 정독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이트앨범2 이후 정말 오랜만에 보는 '삼각관계의 세 캐릭터의 심리와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한' 게임이었다. 캐릭터 구성, 놓인 상황은 화이트앨범2와 비슷해 영향을 받았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대륙이 내놓은 화이트앨범2에 대한 대답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크게 다른 점도 있었으니 무대가 중국이라는 것이다. 강력한 가부장제와 효를 중시하는 유교문화, 거기에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의 청소년들이라는 평소 상상도 못했던 환경에 놓인 캐릭터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신선했다.
주인공은 가정 불화로 고통받는 소년으로, 부모님이 일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가게 되며 혼자 살게 된다. 이렇게 적으면 일본 게임에서 흔히 보던 설정 같지만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전학은 쉬운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남겨두는 것으로 나오고, 두 히로인 중 웬지가 쉽게 전학을 온 것에서 그녀의 부모님이 특권층일 것이라 예상하는 단서가 되어준다.
사회에 대해 사소한 불평을 해도 다른 친구가 경찰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한다거나, 훌륭한 청년의 덕목으로 '바른 사상'이 언급되는 등 중국 청소년의 일상생활 묘사부터가 신선하고 재미있다.
'이 나라에서 돈과 실적에 대해 언급하면 현실적으로 반사회적 파벌로 몰리게 된다'
그런 한편으로 당연히 효를 행해야 할 부모님을 미워하는 게 옳은가에 대한 주인공들의 고민, 자식이 학업을 소홀히 하고 불량청소년이 되자 부양받을 수 없다면 지금 죽는 게 낫다며 강에 몸을 던지는 부모가 나오는 등 현대 한국(일본도 그렇겠지만)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당황스러운 구석도 적지 않다.
작중 대부분 가정에서 아빠가 요리를 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주인공 소년도 요리를 잘 한다. 하지만 히로인들은 요리는 커녕 밥짓는 법도 모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중국의 평범함일까
주인공 소년은 소꿉친구로 드센 성격의 모 샤오쥬와 갑자기 전학온 웬지 사이에서 흔들리고, 두 소녀는 친구가 되지만 서로가 주인공 소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갈등하게 되는데...
'GG'가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일본어로는 '기브업'으로 번역되어 있다
게이머로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2005년이라는 배경 하에 중국 청소년들의 최고 인기게임이 '워크래프트3'라는 점이다. 워크래프트3를 하러 PC방으로 몰려가는 학생들을 잡아오기 위해(?) 선생님들이 순찰을 돌고, 학내 e스포츠 대회 종목은 당연히 워크래프트3이며 경기 장면 해설도 꽤 그럴듯하다. 우승자가 선생님들에게 불려가 공부는 안하고 게임만 했냐고 혼나는 장면은 백미.
워크래프트3 경기 해설장면. '데스나이트가 측면에서 공격합니다. 오오 멋지게 데스코일을 시전, 적 전멸!'
작중 시간이 몇년 흐르자 중국 청소년들은 워크래프트3가 아니라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하고 있으며 동네 불량배 집단이 40인 레이드로 낙스라마스를 클리어하기 위해 싸움은 그만두고 게임 길드로 활동하는 묘사에선 흐뭇한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배경, 상황, 대사도 재미있지만 심리묘사가 특히 일품으로 화이트앨범2 플레이 후 정말 오랜만에 위장이 아픈 느낌을 받으며 읽었다는 점도 언급해 두고 싶다. 화이트앨범2보다는 조금 더 관계가 단순하고 주인공들이 어린 탓인지 깔끔하게 결말이 나는데 이것도 좋았다.
아쉬운 점은 역시 영어와 일본어 자막만 나와있다는 점인데, 개발사에서 시리즈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하니 언젠가 국내에도 정식으로 소개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
일본어 및 영어 독해가 가능한 게이머라면 PSN 일본 스토어(패키지도 나와 있다)나 스팀에서 구입해 플레이해보시길 권한다.
모르는 사이에 미소녀게임의 도가 중국으로 옮겨가 있었다는 느낌이다. 소중화가 아닌 소모에 사상이라고 해야 하나.
마지막으로, 일본어 자막을 보며중국어 더빙을 수십시간 들었더니 뭔가 중국어 단어들이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영어도 일본어도 게임으로 익혔는데.. 중국어도 게임을 많이 하면 익히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