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2017년 2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GDC) 2017은 게임사를 쓴다면 중요한 전기, 터닝포인트로 기록될만한 행사가 아닐까 싶다.
성공한, 혹은 실패한 게임들의 포스트모템, 대형 게임사들의 발표와 함께 GDC 2017에서는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 스타일 과금모델의 문제점이 주요 토픽으로 다뤄졌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게임사들이 유저들에게 여유 이상의 돈을 지불하도록 만드는, '뽑기'(가챠)로 대표되는 확률형 아이템에 의존하는 과금제로 매출을 올리는 것에 대해 '유저 착취'라는 지적이 나왔고, 시장에 맡기면 자정이 불가능하니 개입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지지를 얻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서구권에서 랜덤박스 규제 등으로 이런 시각이 제도화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중일에서도 최소한의 유저 보호장치로 뽑기에 천장(일정 수 뽑기를 진행해서 뽑지 못하면 해당 아이템을 확정 제공하는 것을 가리킴)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단순 뽑기보다는 판매, 혹은 월정액과 결합한 하이브리드 과금모델을 도입하는 게임도 자주 보이게 됐다. 서구권과 비슷하게 규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사실 그 동안 한국은 '뽑기'로 대표되는 확률형 과금제의 해방구였다. 세계 대부분 나라에서 규제되는 컴플릿 가챠(뽑기를 해서 조각을 획득해 모든 조각을 모아야 완제품이 나오는 방식)나 초 저확률 뽑기 등 유저 적대적 과금모델을 대기업들이 편하게 사용해 매출을 냈다. 그나마 확률을 제대로 지켰다면 다행이지만 근래 여러 게임이 확률을 엉터리로 운영하다 유저들의 저항(?)에 직면해 사과하고 뜯어고치는 사례를 지켜본 기억이 생생하다.
칼럼을 통해 몇번 지적한 바 있지만, 한국 게임사들에겐 변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2017년 GDC에 국내 게임사들은 임원, 개발자들을 보내 글로벌 트렌드를 살피게 했고, 넥슨, 엔씨소프트 등 국내 주요 게임사들에서도 과금모델에 대한 비판이 앞으로 더 거세지겠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현재를 보면 그런 공감대가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눈앞의 매출에 변화 거부한 게임사들, 대마불사 믿었지만...
2021년 들어 국내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급격한(?) 변화에 직면해 당황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리니지'의 시대가 끝나고 '자신있을 때'에만 신작을 낸다던 엔씨소프트 'MMORPG'가 시장에서 실패하는 상황도 지켜봤다. '원신'과 같은 일부 마니아 대상 게임으로만 취급했던 서브컬쳐 게임들이 엄청난 매출을 올리며 많은 유저들의 지지까지 받는 것도 봤다.
유저들이 자기가 하는 게임을 칭찬하고 애정을 갖는 것을 '소녀전선' 이후 몇번 지켜봤지만 소수가 즐기는 마니아 게임이라 그렇다는 정도로 적당히 넘겼던 상황에서, 엄청난 매출을 내는(한국 게임사 시각에서 많은 매출=강력한 과금으로 이해된다) '원신' 등이 다수 유저들의 사랑을 받으며 운영되는 건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었을 것이다.
적대적 과금모델을 참고 플레이해 오던 국내 유저들의 저항에도 적잖이 당황한 모양새다. 중국의 게임 규제에 국내 유저들의 유저 적대적 운영, 과금모델에 대한 저항 등이 겹치며 엔씨소프트와 넥슨 등 게임업계 '대마'들의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엔씨소프트와 넥슨은 모두 2017년 GDC 후 유저 적대적 과금모델에 대한 비판을 공유하고 변화가 필요하다며 새로운 과금모델 연구를 검토, 진행했다. 하지만 기존 게임들이 기존 과금모델로 계속 돈을 잘 벌어오는 상황에서 신작에 유저 우호적, 실험적 과금모델을 도입하기보다는 기존 과금모델을 답습, 오히려 강화하는 선택을 했다.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모험을 택하기 보다는 안정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
그 결과 유저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됐고, 늦게나마 변화를 꾀하려 하고 있다. 아인하사드 시스템 개편에 나선 엔씨소프트나 확률 문제로 곤욕을 치룬 넥슨 모두 5년 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 진행했다면 다른 세계선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플랫폼 다변화 속도도 거북이 수준의 한국 게임업계
과금모델은 물론 플랫폼 면에서도 한국 게임사들의 '현실 안주'는 '잃어버린 X년'으로 기록될 것 같다.
우리는 내수시장이 충분히 커서 해외시장 공략에 대한 절박함이 상대적으로 덜한 중국, 일본 게임사들보다 한국 게임사들에게 과금모델 문제나 플랫폼 다변화가 더 시급하다는 생각에 대응책을 빠르게 찾아내야 한다고 꾸준히 지적해 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보니 오히려 증국, 일본 게임사들이 과금 모델에서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고 플랫폼 다변화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그런 중국, 일본 게임들이 한국 유저들에게 환영받으며 국내 시장에 정착했다.
MMORPG 장르를 제외하면 외국 게임들이 국내 시장을 대부분 점유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며 세계시장에서 한국게임 경쟁력이 우려된다던 5년 전의 공허한 외침을 뒤로 하고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은 커녕 안방까지 내주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최근 화제를 모은 '데스루프'라는 게임을 보고 수년 전 국내 대기업 N사 사내 개발팀이 스팀용으로 만들던 게임이 생각났다. 근간이 되는 PVP 개념이 꽤 흡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데스루프'는 완성되어 게이머들에게 전달되었고 국내 대기업 사내 개발팀의 게임은 폐기되고 N사의 개발팀은 해체됐다는 것으로, 적어놓고 보니 차이가 너무 크다.
국내 대형 게임사들은 스팀, 콘솔 플랫폼에 도전하자는 사내 목소리, 개발을 억누르고 코앞에만 집중해 왔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콘솔, PC, 모바일에서 같은 계정으로 하나의 게임을 연속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들이 나오고 있는데 플랫폼 R&D를 이제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할 말이 없어진다.
대형 게임사들이 콘솔 플랫폼 R&D를 한다, 콘솔도 염두에 둔 신작 개발을 한다는 이야기를 수년째 듣고 있지만 실험적 작품이 몇 나왔을 뿐 아직 제대로 된 결과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
위기 속 도전으로 새로운 성공 방정식 만든 게임사들, 희망은 있다
모두가 현실에 안주만 한 것은 아니다. 대형 게임사들이 정체, 혼란, 위기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사이 새로운 도전에 나서 성과를 낸 게임사들도 물론 있다.
멀티 플랫폼, 글로벌, 블록체인과의 결합 등으로 새로운 길을 간 위메이드와 가장 적극적으로 스팀, 콘솔 플랫폼에 도전하며 '완제품 게임 판매' 방식으로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음을 증명한 네오위즈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위메이드와 네오위즈 모두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도전에 나서 결과를 만들어낸 게임사들이다.
위메이드는 한발 먼저 모바일게임 시장에 도전했지만 신작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며 위축되어 IP 사업만 하는 기업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샀지만, 멀티 플랫폼, 글로벌, 그리고 블록체인 적용 등으로 화제를 모은 '미르4'로 개발력도 인정받고 좋은 성적도 거뒀다. 개발중인 신작들에 대한 기대도 커 앞으로 더 높은 도약, 성장이 기대되는 게임사다.
퍼블리싱한 PC게임과 중국 매출에 의존하다 해당 게임의 퍼블리싱 계약 연장에 실패하며 매출 규모가 1/5 이하로 줄어드는 충격적 성적표를 받아들었던 네오위즈도 위기 속에 다른 길을 모색해 새로운 성공 방정식을 제시한 게임사다.
콘솔과 스팀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스팀을 통해 '완제품 판매'라는, 대형 게임사들이 기피하던 방식으로 연이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산나비' 등 차기작에 대한 게이머들의 기대도 크며, 기존 스팀 게임들의 콘솔 이식을 바라는 목소리도 나오는 등 글로벌 게이머들에게 이름을 조금씩 알려가고 있어 앞으로가 더 기대가 되는 상황이다.
콘솔 플랫폼에 애착이 큰 김민규 대표가 이끄는 라인게임즈가 꾸준히 콘솔 플랫폼, 멀티 플랫폼을 시도하고 있고 김형태 대표가 이끄는 쉬프트업도 멀티플랫폼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어 관심있게 지켜봐야할 게임사. 해외 스튜디오 개발을 통해 플랫폼 다변화를 꾀하고 있는 스마일게이트, 크래프톤의 행보도 눈여겨 봐야할 것 같다.
기존 대형 게임사들도 뒤늦게 콘솔, PC 플랫폼으로 신작을 준비중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어떤 신작을 내놔도 '부분유료화, 뽑기'에 의존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유저들 사이에 팽배하다. 기자가 보기에도 '돈슨의 역습'이라며, 유저 친화적 과금모델이 아닌 신작으로 유저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에서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새로운 성공 방정식을 선보인 게임사들이 더 성장하고 좋은 성과를 내서 기존 대형 게임사와 자리를 바꾸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매일 같은 게임이 매출순위 1위를 하기보다는 다양한 게임이 경쟁하는 것이 지켜보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적대적 과금모델로 유저들이 욕하며 돈을 쓰게 만드는 시대의 종언도 보고 싶다.
'소녀전선'과 '명일방주', '원신' 등을 보며 이제 경쟁은 끝났고 중국 게임끼리 글로벌 시장을 놓고 다투는 시대가 오려나 했더니, 중국 정부의 강도높은 규제로 다시 기회가 올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여전히 국내를 대표하는 대형 게임사들이 지금이라도 새로운 길을 찾고 다시 우리에게 찾아 올 기회를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들은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다. 앞다퉈 신작을 공개하고 있는 국내 대형 게임사들이 신작에 더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저 친화적 과금모델도 보여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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