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개막해 29일까지 5일간의 대장정을 마친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 국제경쟁 장편 부문 수상작이 결정됐다.
아담 엘리엇(Adam Elliot) 감독의 '달팽이의 회고록'(Memoir of a Snail)이 장편 대상을 수상했는데, 이미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으로, BIAF에서의 수상도 예상되었던 작품이다.
대상은 예상대로 흘러간 느낌이지만, 두번째 상인 '심사위원상'과 '우수상' 수상작은 놀라움을 줬다. 먼저 세계 거장들의 쟁쟁한 작품들과 경쟁해 심사위원상을 받은 작품이 한국 김용환 감독의 '연의 편지'라는 것에 기자도 놀랐다. BIAF에서 감상하고 너무 잘 만든 작품이라 놀랐지만, 서구권 아트 영화들에 일본에서도 훌륭한 작품이 많이 출품되어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 예상했기에 심사위원들이 어떤 평을 하며 수상작으로 선택했는지 궁금해졌다.
우수상은 장 프랑수아 라귀오니(Jean-François Laguionie) 감독 '정원의 보트'(A Boat in the Garden)와 시노하라 마사히로(Masahiro Shinohara) 감독 '트라페지움'(Trapezium)이 공동 수상했는데, 아이돌을 소재로 한 트라페지움이 진지한 소재를 뛰어난 영상미로 표현한 '후레루' 등을 제치고 우수상을 수상한 점도 놀라웠다.
2024년 BIAF 장편 심사위원으로는 캐나다의 거장 앤 마리 플레밍 감독,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오랫동안 함께 일한 코믹스웨이브필름 츠나미 카즈키 이사와 함께 한국 장르문학의 전설적 대가 이우혁 작가가 발탁되어 심사를 진행했다.
이우혁 작가는 '퇴마록' 시리즈로만 누적 10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한국 장르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젊은 시절부터 즐긴 0세대 오타쿠로 애니메이션 작업에도 다수 참여해 TV애니메이션 '부루와 숲속 친구들', '로보텍스'의 기획, 각본을 담당했으며, 안시애니메이션영화제 미드나잇 스페셜 선정작 애니메이션 '퇴마록'(2024) 각본도 맡았다.
한국의 많은 청장년층이 그랬듯 기자 역시 학창 시절부터 그의 책을 보며 성장한 팬으로 이번 기회에 심사평을 듣고, 그의 작품활동, 작법론 등을 두루 들어볼 기회라는 생각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우혁 작가가 인터뷰를 흔쾌히 수락해 주어 '퇴마록'을 처음 접하고 30년만에 작가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심사평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게이머로서의 이우혁에게 게임을 어떤 마음으로 즐기는가, 어떤 게임을 즐기는가까지 들어볼 수 있었다.
그와 나눈 대화를 옮겨 봤다.
BIAF 출품작 수준 높아 심사 어려웠어
이혁진 기자: 먼저 이번에 BIAF를 둘러보신 느낌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우혁 작가: 가장 처음 느낀 것이 영화제를 정말 힘들게 꾸려가시는구나 하는 점입니다. 저도 예전부터 애니메이션 평론을 많이 했고, 문화부 세미나에도 참석해 KPOP, 도서, 디자인, 아트 등 문화부가 관리, 지원하는 각 부문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대표로 말하러 온 사람들이 있는데 애니메이션은 항목이 없는 것을 보고 어떻게 애니메이션을 빼놓을 수가 있느냐, 한국이 나름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는데 언급조차 안 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강하게 말을 해서인지 그 다음부터는 그런 자리에 불러주지 않더군요.(웃음)
이번 BIAF를 보니 정말 출품된 작품이나 영화제를 찾은 감독님들은 분에 넘치는 수준으로 대단했습니다. 수상작을 선정하기 무척 어려웠고, 하나하나 다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장편 심사위원이다 보니 심사를 위해 장편 12작품을 짧은 기간에 다 보고 심사하느라 단편은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훌륭한 작품이 아주 많았을 겁니다. 못 본 것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영화제를 방문한 다양한 나라 감독님들과도 인사를 했는데, 다들 굉장한 분이고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이 정도로 세계에서 훌륭한 작품과 창작자들이 모이는 자리는 잘 없을 겁니다. 문화적으로 굉장히 파급력이 큰 행사인데 관련 기관 등에서 그런 인식을 못 하고 있는 면도 있고 주최하는 조직위원회도 너무 착하게만 하셔서 예산 규모가 더 커지지 못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도 했고요.
부천천아트센터를 보고 해외에서 오신 분들도 모두 놀랍니다. 시에서 오케스트라도 운영하는데 오케스트라 수준도 상당합니다. KBS 교향악단 같은 곳과 비교하면 조금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어느 오케스트라나 약한 부분은 있게 마련이고, 부천 오케스트라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이런 수준의 오케스트라를 직접 운영할 정도로 탄탄한 토양을 가진 자치단체인 것이고, 나라인 것이죠. 함께 심사를 진행한 츠나미씨도 오케스트라 에디션으로 자기 음악을 들어본 것은 처음인데 아주 좋다고 하더라고요.
한국 문화를 살펴보면 영화에서 주요 배우들의 출연료는 이미 헐리웃 수준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힘든 부분이 많겠지만 스탭 대우도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음악,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을 보면 노벨문학상 작가를 배출했습니다.
이렇게 한국 문화가 발전하고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데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도 강국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BIAF가 그런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인식 문제보다는 치열하게 알리고 예산을 확보하려는 활동이 더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애니메이션 각본가로 활약하신 것을 저는 압니다만, 작가로만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애니메이션 영화제 심사위원이 되신 것에 조금 놀랐을 것 같습니다
이우혁 작가: 애니메이션 각본 작업도 했고요. 부천과는 부천판타스틱 영화제를 처음 만들 때 이장호 감독님과 친분이 있어 초대도 받고 관여를 해서 인연이 전부터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 관련해서는 꽤 오래 전부터 작업을 해 왔는데, 30년 정도 전, 영실업의 새로운 완구를 위한 작품의 기획 작업에도 참여한 적이 있는데 결국 애니메이션은 나오지 못하고 완구만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잘 아실 '또봇'에도 조금 관여했고요.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 관련 작업에 참여한 경험도 많고 TV 애니메이션 두 작품의 각본을 맡은 것도 좋아서 한 것이었습니다. 일로만 생각했다면 주변에서 다 말리는데 안 했겠죠. BIAF에서도 불러주셔서 두말없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안시에서 공개된 '퇴마록' 애니메이션에도 각본으로 참여하셨죠
이우혁 작가: '퇴마록' 애니메이션 공개가 얼마 남지 않아 관련해서 제 이름이 많이 거론되고 있는데, 사실 제가 많이 관여하기보다는 감독님에게 자신의 생각이 있으시니 믿고 맡기는 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은 제가 직접 컨트롤을 다 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려 했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많이 내려놓은 상태로 큰 가닥만 지켜준다면, 정말 아닌 것을 가져와 퇴마록이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작품의 아이덴티티를 해칠 수 있는 정말 크리티컬한 것만 아니라면, 왠만하면 감독님에게 책임지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맡기자는 마인드로 하고 있습니다.
퇴마록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할 순 없습니다만, 크게 보면 퇴마록 시리즈의 인트로에 위치할 작품입니다. 장편 원작의 첫편 딱 하나를 영상화한 것으로, 캐릭터들의 과거에 대한 설명도 생략하고 일정 부분 원작을 읽은 독자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고 만든 작품에 가깝습니다. 한편에서의 완결성보다는 긴 여정의 출발에 가깝게 만들었고, 원작에서 어느 정도 변뎡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어도 퇴마록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퇴마록 애니메이션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하시긴 힘드실 테니 아쉽지만 넘어가서, 이번 BIAF에서 심사위원으로 작품들을 살펴본 소감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우혁 작가: 기본적으로 영상 퀄리티는 아주 좋습니다. 이번에 좋은 작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심사를 위해 흠집을 찾아내기 위한, 냉정한 시선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슬펐습니다. 정말 빠져서 몰입해야 하는 그런 수작들인데... 심사라는 것이 삼사위원들의 상대 평가이다 보니 눈에 불을 켜고 작품의 장단점을 찾아내야 했죠. 심사위원을 한 것이 좋은 기회이자 경험이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죠.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니 공통된 주제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시대상을 반영한 것일 텐데, 대부분 작품이 '소통'과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바로 옆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고독을 느끼고, 친구들과도 마음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이 거의 모든 작품에 녹아 있어서 흥미로운 경험이 됐습니다.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포괄적으로 살펴보며 의식도 생기는 것 같고, 소통이 정말 현대 세계의 핵심 문제구나 라는 것이 실감됐습니다.
문제를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해소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심사했는데, 다른 심사위원님들이 배려심이 많은 분들이라 떠듬떠듬 영어와 일본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화를 나누고 정리를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기준을 '나는 스토리를 중심으로 볼 것이다'라고 제시를 하고 심사를 진행했습니다.
기준을 나는 스토리를 중심으로 볼거다. 앤 감독님과 초반에 논의를 하며 우리가 심사하는 것이 장편이다, 단편이라면 효과나 임팩트, 표현만 볼 수도 있지만 장편은 우선 스토리를 볼 것이다, 다른 부분도 물론 보고 평가하겠지만 우선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고 볼 테니 다른 분들도 각자의 기준으로 평가한 후 의견을 교환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출품작들의 완성도가 모두 엄청 좋아서 심사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주제에 대해 어떤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지는 모두 명확했는데, 그러다 보니 문제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감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문제다,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은 당사자들도 모두가 알잖아요? 어떻게 해야 하는가, 'HOW'를 제시해야 합니다. 결과를 정해놓고 강요하는 것은 좋지 않은 방식이니 직접적으로 이렇게 하라는 것은 안 되지만 제시는 해야 한다. 그런 기준으로 심사했습니다.
작중 주인공 캐릭터가 행동을 했는가가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저 앉아서 고민만 했는가, 아니면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여 줬는가. 영화가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캐릭터가 바뀌는 것이 좋다는 것.
경험과 행동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우혁 작가: 그렇죠. 캐릭터가 성장하고, 해소하는 것. 문제 제기는 모두가 다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나름의 문제 해결을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죠. 영화적으로 스케일 크고 멋진 화면을 보여주는데, 테마나 전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에 감점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깊은 마음 속 이야기가 오가는데 세상의 멸망이 다가오는 식으로 그렇게 다룬다거나... 평소라면 그런 표현이나 연출은 비판할 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출품작들은 하나같이 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런 기준을 두고 봐야 했습니다.
앞서 스토리를 주로 봤다고 언급했는데, 사실 스토리도 흠잡을 작품이 별로 없었습니다. 심사가 정말 힘들었고, 수상작과 상을 타지 못한 작품 사이에는 정말 박빙의 차이밖에 없었습니다.
0세대 오타쿠 이우혁 작가의 '연의 편지', '그리드맨 유니버스' 등 출품작 심사평
심사 기준에 대해 들으며 생각해 보니 '그리드맨 유니버스'는 조금 이질적인 출품작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우혁 작가: 그렇죠. '그리드맨 유니버스'는 독특한 출품작이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어떻게 설명했냐면, '바보같은 남자들의 판타지'라는 것이었죠. 바보가 안 좋은 의미로 쓴 것이 아님은 이해하시겠죠? '그리드맨 유니버스'에 나오는 합체, 변형하는 로보트를 평범한 로보트나 메카닉으로 보면 안된다는 거였죠.
애니메이터 한명 한명에게 애정이 없으면 이런 그림은 나올 수 없다, 순수한 판타지로 봐야지 과학, 엔지니어링적 시각으로 봐선 안 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극중 빅크런치니 뭐니 하는 설명들은 사실 다 핑게고 애니메이터들이 하고싶은 것,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낸 것이니 그런 순수할 열정에 감동하고 박수를 보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었죠. '그리드맨 유니버스'를 만든 분들은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되고 상영된 것만으로도 기쁘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드맨 유니버스'의 주제, 테마가 뭐냐는 질문에는 '그리고 싶은 것', 뭐라고 해야 하나 '가오잡는 것'을 그린 것이라고밖에 답할 수가 없죠. 전투도 시퀀스로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생사를 다투는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적 코앞에서 온갖 폼은 다 잡습니다. 멋지게 폼을 잡지만 바로 맞아 나가떨어지기도 하고, 적이 바로 앞에 있는데 합체하고 변신을 합니다.
빅뱅이니 빅크런치가 무슨 의미인가 고민하시기에 '아무말 하는 것이다, 설명은 대충 했으면 됐고, 제작진이 정말 하고싶은 것은 가족들과 따뜻한 밥을 먹고 싶어, 나는 언제 여자한테 고백 한번 해 보나 하는 호소일 것이다 라고 설명해 드렸죠. 저는 '그리드맨 유니버스'를 보며 그런 호소를 들은 것 같았거든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리드맨 유니버스'에 참여한 애니메이터 여러분의 순수하고 바보같은 열정에 공감하고 크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번 BIAF 장편 부문에서는 한국 작품 '연의 편지'가 심사위원상을 받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우혁 작가: '연의 편지'는 굉장히 좋게 봤습니다. 사실 제가 어떤 작품을 보고 좋았다고 이야기를 대개 하지만 고집이 있어 '정말 좋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연의 편지'는 이건 정말 좋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정말 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식 심사평에서는 과장되게 폭력이 많지도 않았고, 과장되게 신파로 흐르지도 않았고 과하게 열정적이지도 않게, 잔잔하게 기술적으로 잘 다뤘다고 했는데,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원작 웹툰을 아직 못 봤지만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원작을 정말 잘 살렸지 않나 싶습니다. 김용환 감독이 자신이 겪지 못한 80년대를 정말 기가 막히게 영상으로 재현했다는 점입니다. 그 부분을 개인적으로 높게 평가하는데, 내 시대를 잘 표현하는 것보다 어려운 내가 겪지 않은 시대를 잘 재현하는 것에 성공했기에 감독으로서 역량이 아주 기대된다고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스토리도 굉장히 깔끔합니다.
제가 심사를 할 때는 마음을 돌같이 만들어 냉정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편인데요. 호러 작품에서 점프스퀘어가 나와도 심장 박동이 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감정을 흔들려는 시도가 나와도 변함없이 목석이 되어 작품을 감상합니다. 그런데 '연의 편지'를 보는데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 정말 너무 궁금해 지더라고요. 이번 BIAF의 전체 심사 과정 전반을 크리티컬한 시각에서 잘 만들었는가, 단점이 있는가만 보다 딱 한번 마음이 흔들리고 몰입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보다가 눈물을 조금 흘렸습니다
이우혁 작가: 연출을 잘 해서 보통은 울지 않을까요? 정말 심사위원의 입장을 떠나 마음이 움직인 유일한 케이스였어요.
'연의 편지'는 분명히 좋은 작품이라고 거리낌없이 보장할 수 있습니다. 흥행 면에서도 '마당을 나온 암탉'이 세운 기록(기자 주: 220만 관객 동원)을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스토리만 좋은 것이 아니고 작화, 작품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연의 편지'의 수상은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만, '트라페지움'이 우수상을 받은 것에는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이우혁 작가: 생각해 보면 나이든 남자인 제가 아이돌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기도 힘들고 좋아하기도 힘들 겁니다. '트라페지움'을 보고 자존심, 이기심 때문에 아이돌이 되려고 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는데, 저는 그래서 점수를 줬습니다.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느꼈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자존심 때문에 움직이고 행동하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작품 내에서 주인공 본인이 해결하고 해소되는데 작품 밖에서 지켜보는 우리가 그런 동기나 행동에 대해 뭐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기자님도 '트라페지움'이 이우혁과는 거리가 가장 먼 작품일 거라는 선입견이 있으셨을 텐데, 저는 그 솔직한 면에 점수를 많이 줬습니다. 솔직하다고는 해도 아이돌의 실제 환경에 대해 리얼리즘이라고 할 정도로 까서 보여주지는 않은 것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더 갔다면 저야 좋았겠지만 대중 작품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것 아닌가...
'트라페지움'이 그림체나 작화는 오소독스한데 그 속에서 솔직한 시도를 한 것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인간은 현실에서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제대로 표현을 했죠. 그래서 '트라페지움'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후레루'도 이번에 봤는데,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이우혁 작가: 앞서도 강조했듯 다 좋은 작품이라 상대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트라페지움'의 주역인 젊은 여성들은 나이많은 남자인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트라페지움'은 출품된 작품 중 가장 솔직한 작품이었어요. 아이돌을 소재로 다뤘는데, 아이돌의 빛나는 면만 비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 것이 좋았습니다.
'후레루'도 물론 좋은 작품이었는데, 애니메이션 팬으로서 보는 시각과 심사하는 눈으로 보는 시각에서 조금 판단이 갈린 것 같습니다.
사전 정보 없이 보고 심사했는데, '트라페지움'을 평할 때 나중에야 '트라페지움'이 실제 아이돌 출신인 원작자가 쓴 작품이라는 것을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내가 공감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 작품은 좋았는데 수상을 못해 안타깝다 싶은 작품도 있으셨나요
이우혁 작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까운 작품으로 '인투 더 원더우즈'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일견 매우 평이한 스토리로 보이는데 메타포를 굉장히 잘 쓴 작품입니다. 메타포를 잘 쓰는 창작자가 드문데 근본 함의를 담고 동시에 풍자와 비판의 의미까지 담아 넣어야 하는 것이라 굉장히 박학다식하지 않으면 쓰기 힘듭니다.
그런데 '인투 더 원더우즈'를 보니 메타포를 정말 감독이 '내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다'고 과시, 자만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첫 부분부터 굉장히 혼란스럽게 보이고 심사를 할 때에도 혼란스럽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 한편으로 감독이 진짜 의도적으로 메타포를 쓰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흐트려 놓은 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판단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심사를 할 때 저는 '이 작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작품'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정말 앨리스와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듯, 아이들을 보면 상관없이 맥락이 바뀌고 관심이 막 옮겨 다니고 하는 그러잖아요? 그렇게 장면이 막 바뀌고 일견 맥락없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수법적으로 그렇게 한 것으로, 잘 계산된 걸작입니다.
'인투 더 원더우즈'는 중반까지도 계산된 작품인가 우연인가를 판단하기 힘들어 유심히 봤는데, 후반부에 가니 완전히 잘 소화하지는 못하지만 계산된 것이라는 판단이 됐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에게 역할이 있고 자기 생각이 있고 해결이 되니까요.
제가 오래 전 '트랜스포머' 실사 영화 1편을 보고 시나리오를 정말 잘 썼다고 평가했는데, 당시에는 이해를 못 받았습니다. 그때 한말과 비슷한 것인데, '트랜스포머'에는 거기 나오는 모든 사람, 이름없는 군인이나 악당들에게도 자기 역할이 있고 자신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잘 된 시나리오인 것이죠. 얼핏 봐서는 로봇들이 쿵쾅쿵쾅 싸우기만 하고 주제나 내용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철학서가 아니라 영화 스토리라는 측면에서 정말 잘 쓴 시나리오입니다. '어벤져스' 같은 작품도 굉장히 좋은 시나리오이죠. MCU나 어벤저스 모든 작품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몇개 정도지만요. '트랜스포머' 후속작들이나 마블도 그 작은 부분을 잃어버리니 시나리오가 무너져 버립니다. 그런 부분이 작가의 역량, 기술인 것 같습니다.
결국 수상작 선정이 불발됐는데 개인적으로는 너무 좋았기에 안타까웠습니다. 감독이 정말 재능있다고 느꼈는데, 조금만 자제했다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결국 수상은 못했지만 작품과 감독의 재능을 높게 평가한다는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연의 편지'보다도 높게 평가한 작품이었는데, 장점만 이야기했을 때 그렇다는 것으로, 단점이 제시되니 할말이 없어지더군요.
퇴마록 애니메이션은 확실히 퇴마록이라 느낄 작품 될 것
작품을 쓰실 때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하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처음 '퇴마록'을 쓰시던 90년대 초에는 자료를 찾기도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우혁 작가: 그런 부분은 그냥 하면 됩니다. 특별히 힘들거나 고생했다 인식한 적은 없습니다. 애니메이션을 구하기 힘들던 시절에도 알아서 다 구해서 봤고, 모델러였던 젊은 시절 구하기 힘든 것도 다 구해서 만들었고요.
요즘도 덕질하는 사람을 보고 '저런 굿즈는 어디서 사는 거지, 구하는 거지' 싶은 경우가 있을 텐데, 덕질하듯 하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물론 당시엔 책이 공간도 차지하고 들고 읽어야 하니 아무래도 시간적으로, 양적으로 어려움은 있었죠.
다행히 저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이고 잘 잊지도 않는 편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부분은 잊더라도 맥락은 평생 기억합니다. 주인공 이름이나 세세한 전개 같은 것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큰 틀에서 기억하고 있으면 됩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요즘도 메모는 잘 하지 않는데 전화번호와 같은 숫자는 기억하기 힘들어 저장, 메모를 활용합니다. 하지만 사건이나 스케쥴, 약속 같은 것은 지금까지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사실 '치우천왕기'를 쓸 때에는 자료가 너무 방대해 정리를 해 보자고 시도를 했습니다. 3명이 달라붙어 정리하는 데에만 2년이 걸렸고,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혼잡해지진 않았습니다만 실제 필요는 없더군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정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한 자료 조사에 대해서는 특별한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당시에도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저는 90년대 말 일본 문화 개방 후 비교적 쉽게 애니메이션을 봤습니다만, 80년대에는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우혁 작가: 이장호 감독이 제 컬렉션을 빌려가서 보고 참고하고 했을 정도로 많이 모았었죠. 서울에서 살았지만 애니메이션은 부산에서 보따리상을 통해 구해야 했습니다. 한번에 몇백개 단위로 주문해서 엄청나게 봤죠.
그 시절 애니메이션을 파던 사람들은 금지되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싶었던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모임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알음알음 사람들을 모아 프로젝터도 사서 애니메이션 상영회도 했고, 송락현씨와 같이 일한 기억도 나네요.
'퇴마록'에서 오컬트 소재, 한국 무속을 다룬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 저만이 아닐 텐데, 근래 들어서는 무속을 소재로 한 작품이 꽤 많이 나오고 인기를 모으는 것 같습니다
이우혁 작가: 국내 오컬트 소재 작품들의 백그라운드, 지식적 발단 역할을 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종로서적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종로서적은 어떤 책이라도 절대 버리지 않는 서점이었습니다. 이 책은 절대 쓸모없다고 해도 어떤 관점으로 보면 그 안에서 찾을 것이 있는 법입니다. 간접 데이터가 되어 줍니다.
혹세무민하는 사이비종교의 책이라도 그 안에서 필요한 것만 뽑아내면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구나,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부분만 선별해 뽑아내면 되는 것이죠. 처음에는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상한 책을 많이 사간다고요. 필요한, 그것만 떼서 사용하는 것인데 주변에서도 이해를 못 했죠. '그런 사건이 있었다', '그런 신앙, 전설이 있었다'는 것을 뽑아내 재해석, 재창조한 것입니다.
요즘 서점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고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재고 문제도 있고 하지만 다양성이 갈수록 줄어듭니다. 서점에 가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요즘은 서점에 잘 가지 않게 되는 것이, 가도 모르는 책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틈만 나면 서점에 가서 옛날 책들이 쌓인 창고도 가 보고, 그야말로 처음 보는 책을 만나게 되고... 호기심 충족을 위해 찾던 곳이 서점인데 요즘엔 다 아는 책만 있으니 호기심 충족이 안됩니다.
이야기를 되돌려, 무속, 오컬트는 우리의 정신 세계에 들어있는 요소입니다. 종교가 필요없다는 사람도 많지만 의식 세계에 종교가 들어가 있지 않냐고 하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오마이갓', '지저스'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잖아요? 특정한 종교가 없다고 하는 일본 사람들도 다들 무의식중에 '카미사마'를 찾을 겁니다. 종교 자체로서가 아니라도 문화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 나라는 오히려 그런 면이 적은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초월적 존재보다는 조상님이 잘봐줘서 잘 된 거라고 하니까요. 불교적인 것도 섞여 있죠. 실상을 대변해 주는 것에 대해 의견으로 있다 없다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그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미워하거나, 혐오하고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퇴마록' 애니메이션도 곧 나올 테고 실사화에 대한 기대도 높습니다. 속편을 기대하는 팬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우혁 작가: '퇴마록'이 매우 긴 스토리라 애니메이션 첫 작품부터 뭔가 설명하려 하면 안 되고, 전체 시리즈의 인트로 느낌에 가깝습니다. 이 작품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소개하는, 원작 1편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서 감독의 생각을 조금 가미한 작품이 됐습니다. 박신부의 과거도 자세히 안 나오고 원작과 조금 다른 부분도 있고요. 개연성을 고려해 캐릭터를 조금 변경한 부분도 있는데, 감독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고 제가 다 져드린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원작의 핵심이 변한 것은 없고 퇴마사들이 어떤 사람인지만 전해지면 될 것이라 믿고 만든 것에 가깝습니다. 사실 원작에서도 처음부터 설명하고 시작하진 않았는데, 그런 부분을 감독님이 충실하게 따라 주셨습니다.
제가 마스터 플랜은 제시했는데 그 중 감독님이 선택하신 것이 반영됐습니다. 몇 가지 안을 제시한 것 중 고른 것으로, 너무 자세하게 간섭은 안 하고 감독님 하고싶은 대로 하시게 했습니다. 오랜 독자들은 불평할 수도 있는데 큰 시각에서 감독님이 어떻게 '퇴마록' 이야기를 펼쳐낼지 기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예전에는 한국만 유독 원작자의 지위, 권한이 낮은 것 아닌가 하기도 했는데, 다른 나라도 다 그렇더라고요. 결국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의 특성이 있는 것이고, 감독의 마음이 담겨야 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창작은 자유롭게 해야 하고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마인드를 갖고있는데, 제가 그렇게 할 순 없죠. 원작자이자 각본가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싸우지만 고집을 부리고 선을 넘으면 안 됩니다. 애니메이션이 궁금하시겠지만 아직 세부적인 부분에서 조정중인 부분이 있어서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온 것이라 이해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애니메이션은 분명 '퇴마록'이라는 것입니다. '이거 뭐야?'가 아니고, 팬들이 보시면 '이건 퇴마록 맞네. 캐릭터가 그대로네'라고 느끼실 겁니다. 캐릭터의 정신, 생각이 그대로인가 아닌가가 굉장히 중요한데 거의 그대로 구현됐습니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고,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변화가 있을 겁니다. 너무 깊이 파고들어가지도 않았고 구체적으로 설정을 고집한 것도 아닌, '아 퇴마록 느낌이 나는구나', '이렇게 스토리가 흘러가는구나' 라는 감상 포인트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상당히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작자의 시선에서 크리티컬하게 평가할 거라고 벌벌 떠시던데 보고 나서 저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여기 와서 심사한 작품들과 비교하자면 예술성은 부족할 수 있지만 스토리가 박진감 있게 굴러가고 조금 끊기는 면은 있지만 잘 이어지며 전체적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BIAF에 와서 츠나미씨에게도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처음 소설을 쓸 때 결심한 것이 1000명에게 30의 감흥을 줄 것이냐, 100만명에게 5의 감흥을 줄 것이냐 중 택한다면 후자를 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택에 미련이 없고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다. '퇴마록'을 처음 쓰던 당시 저는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소설을 써야 하나, 계속해서 써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소설가가 된다면 어떤 글을 써야 하나에 대해 고민해 후자를 택했고 다시 돌아보지 않기로 했던 것이죠.
대신 5의 감흥도 줄 수 없는 작품은 만들진 않습니다. 최소한 5의 감흥을 주고, 독자가 더 캐내려고 하면 30, 40, 50도 캐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늘 고민하고 애쓰는 부분입니다. 많은 분들이 재미를 느끼면서도 그런 깊이까지 담으려 하는 것이 사실 딜레마인데,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도 계속 공부도 하는 것이고요. 쉽고 재미있지만 뭔가를 담고 있는 작품을 쓰려고 합니다.
저는 진리라는 것이 어딘가에 숨어있지 않고 사방에 널려 있는데, 너무 흔한 것이라 돌아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평범 속에 캐릭터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츠나미씨가 캐릭터 메이킹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어보던데 모델과 내 경험에서 오는 것이라 어렵지 않다고 답해 줬습니다.
가끔 젊은 분들이 와서 물어보곤 하는데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나를 만나러 올 때까지를 한번 써 봐라, 가족을 캐릭터로 묘사해 보라'고 주문해 봅니다. 대개는 못 하더군요. 택시기사, 지나가는 행인 한명 한명에게도 개성이 있는데, 그 개성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많은 책을 내며 캐릭터를 굉장히 많이 만들어 냈는데, 이미 '삼국지' 등장인물 수를 넘어갔을 겁니다. 그렇게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 하면 쉽진 않지만 나에게는 80억개의 모델이 있다고 답합니다. 힘들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세상 80억 인구에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개개인의 차이점을 보라는 것이죠. 이번에 부천에서 이동할 때 기사님이 4번 바뀌었는데 성격이 계속 바뀌는 것을 눈여겨 봤냐고 하면 봤다는 사람이 없더군요. 하지만 저는 계속 봤습니다. 뒷모습만 보고 얼굴은 못 봤지만, 행동과 뒷모습, 말투만 봐도 온화한 분이구나, 와일드한 분이구나, 깜빡깜빡 하는 분이구나 같이 개성이 다 있고, 멀리서 보면 그런 개성이 와닿지 않으니 가까이서 보라는 것입니다. 책도 많이 보면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는데, 정말 이끌어가는 것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일 겁니다.
젊은 시절 SF적으로 인간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결정형 우주 생명체를 구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생명체의 문화와 생활을 만들어 보려고 몰두하다 결국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필요한가, 인간과 아무 관계없는 문화와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 인간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 끝에 사람과 관련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판타지라도, 동물, 곤충, 신, 외계인을 그려도 모두 다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작가의 자만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아직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도 잘 모르는데, 인간이 무엇인지 답을 못 내고 제대로 탐구하지 못했는데 의미없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下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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