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세계 게이머들을 슬픔에 잠기게 한 소식이 전해졌다. 세계적 게임기업 닌텐도를 이끌어 온 이와타 사토루 대표가 사망했다는 것. 향년 55세, 사인은 지병인 담관암이었다.
이와타 대표는 세계적 대기업 닌텐도 대표라는 직함 이전에 걸작 게임들의 개발에 직접 참여한 게임 개발자이자 어릴 적부터 게임에 심취한 '진짜' 게이머였다. 그렇기에 닌텐도 게임, 게임기를 좋아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세계 게이머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일 거다.
2002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110년을 이어온 전통의 게임기업 닌텐도 대표로 취임하며 세계적 유명인사가 되기 전부터 이와타 사토루는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게임 프로듀서로 게이머들에게 친숙한 인물이었다.
1959년생인 이와타 사토루는 고등학생 시절이던 1976년 이미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해 전자계산기를 활용한 게임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 진학 후에는 컴퓨터 주변기기 및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던 하루연구소(HAL研究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졸업 후 정식으로 하루연구소에 취업해 프로그래머 인생을 시작했다.
닌텐도가 '패미컴'을 출시한 후에는 패미컴용 게임 '핀볼', '골프' 등을 만들었고 특히 '벌룬파이터'는 그의 천재적 프로그래밍 실력을 보여준 당시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1992년 하루연구소 대표로 취임한 후에는 '별의 카비' 시리즈, '대난투 스매쉬브라더스' 등 걸작 게임들의 개발을 이끌었다. 특히 지금도 세계 게이머들의 지지를 받으며 리메이크 혹은 속편 발매를 원하는 목소리가 큰 '마더2 기그의 역습' 개발에는 프로듀서 겸 프로그래머로 참여해 게임사에 남을 걸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닌텐도 산하 개발사가 된 하루연구소를 이끌던 이와타 사토루는 2000년 당시 닌텐도 대표였던 야아우치 히로시(山内溥)의 발탁으로 닌텐도 경영기획실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인 2002년에는 역시 야마우치 히로시의 지명으로 닌텐도 4대 사장으로 취임해 세상을 깜짝 놀래켰다.
사실 닌텐도는 1889년 야마우치 후사지로우(山内房治郎)가 창업한 후 100년 넘게 야마우치 일가가 대표직을 맡아 왔다. 특히 닌텐도 3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는 1949년 회사를 물려받아 50여년 동안 경영하며 세계적 게임기업으로 키워낸 공로자. 그러나 야마우치 히로시 닌텐도 3대 사장은 4대 사장도 야마우치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젊은 이와타 사토루를 차기 사장으로 지명했다. 이와타 사토루의 사장 취임 후 닌텐도는 기존의 대표 1인 의사결정 체제에서 임원들의 집단 의사결정 체제로 이행하게 된다.
이와타 사토루가 닌텐도 사장으로 취임한 2002년, 닌텐도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패미컴과 슈퍼패미컴으로 세계를 석권하던 옛 영광을 뒤로하고 닌텐도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대표되는 첨단 게임기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
하루연구소 시절부터 게임이 화려해지고 고도화될수록 기존 게이머들은 금방 게임에 질리고 게임에 새로 진입하려는 유저들에겐 장벽이 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이와타가 이끄는 닌텐도는 2004년 '게임인구 확대'를 기치로 내걸고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 DS'를 선보인다. 잘 알려져 있듯 닌텐도 DS는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와타 사토루의 노림수대로 게임은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존재가 되어갔다.
그리고 2006년, 닌텐도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Wii를 선보인다. 이와타 시게루와 닌텐도가 세계 게이머들을 완전히 사로잡는, 닌텐도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간'의 도래였다.
이와타 사토루가 2005년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GDC) 강연에서 한 말, "나의 명함에 적힌 직함은 사장이지만, 머릿속에서 나는 게임 개발자이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게이머이다"라는 말은 그가 어떤 길을 밟아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사장이 된 후에도 이와타는 개발에 꾸준히 관여해, 2005년까지 미야모토 시게루와 함께 개발 라인을 반씩 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닌텐도는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한다. Wii는 세계적으로 1억대(누적) 팔려나갔으며, 닌텐도 DS도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당시 이명박 前 대통령이 '우리나라는 닌텐도 DS 같은 것을 못 만드느냐'고 말한 것을 기억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사들도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픽과 기술집적보다 게임성을 택한 닌텐도의 선택도 시간이 가며 성능차가 지나치게 커지자 약점이 드러났다. 2011년 발매한 닌텐도 3DS는 3D 기능을 도입했지만 성능면에서는 DS보다 크게 나아진 점을 보이지 못했고, Wii의 후계기로 출시한 Wii U는 최악의 실적을 거두며 닌텐도의 이와타 사토루 시대 후반부에 '고전'과 '실패'의 이미지를 씌웠다.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4로 다시 한 번 도약하고 마이크로소프트도 신형 게임기를 내놓은 상황에서, 이와타 사토루가 이끄는 닌텐도는 마침내 모바일게임회사 DeNA와 제휴해 모바일게임에 뛰어드는 역사적 결정을 했다. 야마우치 히로시의 유훈, '다른 업종에 발을 담그지 말라'를 어겼는지 아닌지 미묘한 부분이지만 닌텐도가 한층 도약할 기회를 마련한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닌텐도의 새로운 시대를 계속해서 이끌어갈 것이라 믿었던 이와타 사토루는 아쉽게도 2015년 7월 11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계속해서 재미있는, 좋은 게임을 세상에 선보이며 어린 세대를 게임에 친숙하게 만들며 더 코어한 게임으로 나아갈 다리를 놔준 닌텐도는 세계의 게이머, 게임 개발자들에게 좋은 동지이자 동반자였다. 계속해서 더 좋은 그래픽, 더 나은 기술에 힘을 쏟았던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어쩌면 닌텐도에 빚을 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공식 트위터 계정은 이와타 사토루 사망소식에 애도와 함께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이와타 사후 닌텐도는 차기 사장이 정해질 때까지 개발부문을 총괄하던 타케다 겐요 전무와 미야모토 시게루 전무가 공동대표를 맡게 된다. 이와타 사토루라는 거인의 자리를 이어받을 닌텐도 5대 사장의 양 어깨엔 무거운 책임과 역사가 걸리게 된다.
누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게임 개발자이자 게이머로 게임과 게임 개발을 잘 이해하고 있던 이와타 사토루에 이어 개발자 출신 사장이 나오기를 (개인적으로) 기대해 본다.
| |
| |
| |
| |
|
관련뉴스 |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