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판 로빈슨 크루소, 초긍정의 '마션' 삐딱하게 바라보기

등록일 2015년11월09일 17시34분 트위터로 보내기
 


화성에 홀로 남겨진 채 약 400여 일을 살아야 했던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의 지구 귀환기를 다룬 '마션'은 자연스레 다니엘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1719)를 떠오르게 한다. '화성판 로빈슨 크루소'라고 할까? 물론 그것만으로는 살짝 부족하다. 거기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더한다면 '마션'의 성격을 보다 정확히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류승완 감독은 "<그래비티> 만큼의 긴장감과 <인터스텔라> 만큼의 스케일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유머러스하면서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새롭게 느껴진다"고 평가했다. 흥행에 있어서도 '마션'은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가 구축해놓은 '우주불패'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흥미로우면서도 안타까운 점은 '로빈슨 크루소'가 '모험소설이기 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소설(박홍규)'이며, '인공낙원의 건설과 야만족의 위협, 그리고 총과 기독교에 의한 배제가 '로빈슨 크루소'의 기본구조'라는 반(反)제국주의적 관점 혹은 반(反)인종주의적 관점의 비판이 제기되는 것처럼, '마션'도 리들리 스콧 감독의 배우 교체로 인해 인종 차별 논란에 휩쓸렸다는 것이다.

원작인 앤디 위어의 소설 '마션'에서는 한국계 미국인인 민디 파크(마크 와트니가 화성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NASA 직원)가 백인 배우(맥켄지 데이비스)로 대체됐고, 인도인이었던 빈센트 카푸어(NASA 화성탐사계획의 총 책임자)는 흑인 배우(치웨텔 에지오프)로 바뀌었다. 물론 인물의 설정을 변경하는 것과 캐스팅은 감독의 권한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리들리 스콧의 백인 선호(?)는 작년에 개봉했던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에서도 제기됐던 문제였다. 그는 히브리인 모세와 이집트인 람세스 역을 백인 배우인 크리스천 베일과 조엘 에저턴에게 맡긴 바 있다. 여기에 '마션'의 주연 배우 맷 데이번은 HBO의 리얼리티쇼 '프로젝트 그린라이트'에서 "인종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는 영화 캐스팅을 가지고 이야기해야지 누가 찍느냐를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로빈슨 크루소'와 '화성판 로빈슨 크루소'라고 할 만한 '마션'이 비슷한 유형의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마션'의 마크 와트니도 화성에서의 경험에서 자신이 '최초'였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감자 재배에 성공한 후 "행성을 경작하는 자가 곧 그 행성의 지배자"라고 말하는 대목은 다소 불편하게 읽힌다.




살짝 삐딱할 수밖에 없는 외재적 관점을 제거하고 오로지 내재적 관점에서 '마션'을 바라보면,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의 생존기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처럼 마크 와트니의 화성 생존기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물도 산소도 없는 화성에서 과연 인간은 생존할 수 있을까? 그것도 '홀로' 말이다. 마크 와트니는 식물학자라는 자신의 직업을 십분 발휘해서 감자 재배에 성공한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재배에 필요한 물도 만들어낸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초(超)긍정의 에너지로 가득찬 마크 와트니는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난 여기서 안 죽어!"라고 단호히 내뱉는 그의 태도는 생존 의지 그 자체다. 다만, 영화는 기본적인 서사 구조를 비껴가지 않는다. 이쯤이면 위기가 닥칠 거라고 예상되는 포인트에 정확히 위기를 마련해놓았다. 관객의 입장에서 높은 예측 가능성은 지루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까? '마션'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영화의 짜릿함이 생각만큼 발휘되지 않는다.


'로빈슨 크루소'를 영화로 재해석한 '캐스트 어웨이'가 홀로 남겨진 인간이 겪은 고독과 외로움을 철학적으로 풀어내면서 감동을 더했다면, '마션'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중간에 지구와의 교신에 성공하긴 하지만,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꽤나 긴 기간 홀로 지내면서도 마크 와트니는 '멀쩡'하다. 거듭해서 깔리는 경쾌한 음악들은 그 어떤 긴장감도 배격한다.

마크 와트니의 '멀쩡함'은 관객들의 입장에서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인간적 고민이 결여된 마크 와트니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관객들은 철저히 제3자적 입장에서 마크 와트니의 위기를 바라보게 된다. 혹시 이 영화가 지루하게 느껴졌다면, 그건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특유의 경쾌함에 있지 않을까?




"이건 정치가 아니라 과학"이라며 로켓 엔진을 선뜻 빌려주는 중국의 등장은 G2를 의식한 것이 다분한데, "이건 영화가 아니라 정치"라고 외치는 것 같아 다소 민망하다. 결국 '마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것과 다를 게 없는데, 비록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책임진다는 동료 의식과 세계를 열광케하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자부심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 들어간 비용은 수십억 달러에 달할 것이다. 괴상한 식물학자 한 명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을 쏟아 붓다니. 대체 왜 그랬을까? 그렇다.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내가 진보와 과학, 그리고 우리가 수세기 동안 꿈꾼 행성 간 교류의 미래를 표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타인을 도우려는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렇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나쁜 놈들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 주었다. 멋지지 않은가?" (소설 '마션'중에서)

원작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영화를 관통하는 특유의 긍정주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크 와트니를 구하겠다고 나서는 동료들의 모습은 (현실적이진 않지만) 충분히 감동적이다. 한 명의 생존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맛대고 고민하는 모습들은 인류에 대한 희망을 품기에 부족함이 없다.

화성의 모습과 가장 닮은 곳으로 낙점된 요르단의 와디 럼 사막의 광활함은 눈을 즐겁게 해주고, 2시간에 걸쳐 원맨쇼를 펼치는 맷 데이먼의 연기는 '역시'라는 감탄을 자아낸다. 중간중간 거슬리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마크 와트니의 화성 생존기(+ 지구 귀환기)를 통해 긍정의 힘을 얻어 영화관을 나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값진 것 아닐까?


글 제공 : '버락킴' 그리고 '너의 길을 가라' 블로그(http://wanderingpoe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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