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안의 공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고 어느새 색(色)이 바뀐다. 종이로 접은 새가 마술사의 손을 떠나자 진짜 새가 되어 허공을 난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칼에 몸이 반토막이 난 마술사가 멀쩡히 살아나기도 한다. 무대라는 공간에서 불가능이란 없다. 마술사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의 손짓 하나, 그의 표정 하나에 몰입한 관객들은 황홀경에 빠져든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마술이란 실은 눈속임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마술사는 '속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팔짱을 낀 관객들의 마음은 어느새 사르르 녹는다. 속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오히려 '속임'을 전제로 한 이 무대엔 '속음'으로써 발생하는 유쾌함이 있다. 사랑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랑은 마치 마술 같고, 마술은 그 자체로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로맨스'를 주제로 한 '조선마술사'가 그 소재로 '마술'을 선택한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歸結)처럼 보인다. 조선 최고의 마술사인 물랑루[없을 물(勿), 밝을 랑(朗), 정자 루(樓)]의 환희(유승호)와 청나라의 왕자빈으로 간택돼 이국 땅으로 팔려가는 청명(고아라)은 마치 마술처럼 사랑에 빠진다.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던 상처 입은 두 사람이 우연한 만남을 통해 급격히 서로에게 빨려들어가고, 급기야 자신들을 속박하고 있던 '현실'을 뒤집어버린다.
영화 '차이나타운'에 대한 글에서 "표정 변화조차 없이, 감정을 철저히 봉인한 채 그저 '쓸모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던 일영이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전개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문장을 쓴 적이 있었는데, 지인으로부터 '넌 사랑에 대해 잘 모른다'는 취지의 핀잔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 사랑에 개연성(蓋然性) 따위가 다 무엇인가?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자. 사랑에 윤리(倫理)는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불가능 속에서 더욱 뜨거운 사랑을 키웠던 것처럼, 환희와 청명 사이에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분'의 차이는 '조선'이라고 하는 전근대 사회에서 넘볼 수 없는 성역과도 같았다. 거기에 더해서 나라와 가족이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던 청명에게 환희와의 사랑은 한 줄기 빛인 동시에 두렵고 버거운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이 높디 높은 현실의 벽을 '사랑'은 기어코 넘고야 만다. '조선마술사'는 '마술'을 통해 이 로맨스를 가능케 만든다. '결국 이 둘은 행복하게 살았을까요?'라는 '현실적 질문'을 과감히 무시한다. '청명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청명은 가족들을 떠올리지 않고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을까?'와 같은 꿉꿉한 질문들도 가볍게 흐트러버린다. 그렇게 오롯이 '사랑'에만 집중한다. 마술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것처럼.
비록 영화적인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들이 눈에 띄었던 건 사실이다. 캐릭터의 역할 분담이 지나치게 '기계적'이었던 것이 그렇다. 그래서 캐릭터들 간의 조화가 잘 이뤄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악역이 지나치게 전형적으로 그려진 것은 치명적이었다. 복수의 화신 귀몰 역을 맡은 곽도원이 특유의 연기력으로 애를 쓰지만, 만회하기엔 다소 역부족이었다. '마술'이라고 하는 소재도 제 역량을 다 드러내지 못했다. 스토리 전개나 편집에 있어서도 누수(漏水)가 도드라진다.
무엇보다 '조선마술사'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들이 가득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예쁘게 보인다. 그것은 유승호와 고아라의 힘일까? 아니면 '마술'처럼 사람을 홀리는 '사랑'의 힘일까? 타고 난 이야기꾼 소설가 김탁환과 기획자 이원태가 남사당패 '얼른쇠'와 청나라로 팔려간 '의순공주'라는 역사적 사실에 착안해 쓴 '조선마술사'를 영화화한 '조선마술사', 그 판타지 속에 한번 빠져보는 건 어떨까? 물론 이 영화가 팔짱을 단단히 채운 관객들을 홀릴 만큼 매력적이라 (단호하게) 말할 순 없겠지만...
글 제공 :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http://wanderingpoet.tistory.com)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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