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리뷰 내용 중에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의 내용을 설명, 해설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아직 안 보신, 스포일러를 피하려는 분들은 먼저 극장에서 작품을 본 뒤에 기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 아래 스틸샷들은 보도를 위해 배급사에서 배포한 것입니다.
새로운 블리자드 게임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대하게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비롯한 영상들이다. 마치 절대반지에게 유혹당한 골룸처럼 영혼석의 유혹으로 타락해 다음 대 '디아블로'가 된 전사의 절규,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로 유명세를 치른 '워크래프트3' 휴먼 캠페인 엔딩 영상, 최근 게임 외적으로 만들어진 '오버워치' 단편 애니메이션들까지 게임 내외를 가리지 않고 블리자드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들은 그들의 게임이 가진 캐릭터와 설정을 가장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의 하나였다.
그렇기에 2006년 워크래프트를 시작으로 블리자드가 자신들의 게임을 더 이상 시네마'틱' 트레일러에 가둬두지 않고 시네마, 즉 영화로 만들겠다고 발표를 했을 때 게임 팬뿐 아니라 영화 팬들까지 열광했다.
그로부터 10년, 애초 내정된 감독이었던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가 하차하고 '더 문', '소스코드' 등 독특한 SF를 연출한 신예 던칸 존스로 교체 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이라는 영화가 마침내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관객들은 10년의 기다림에 보답을 받았을까?
시작은 좋았다. 마치 팔락거리며 넘어가는 마블 스튜디오의 로고처럼, 얼어붙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로고 안에 디아블로, 케리건, 리치왕, 트레이서 등 블리자드 대표 게임 캐릭터들이 보인다. 워크래프트를 시작으로 영화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게임들이다. 로고가 지나가면 1994년 발매된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제1작, '워크래프트: 오크와 인간'을 베이스로 한 영화가 시작된다.
원작의 제목처럼 오크와 인간의 1대1 전투로 막을 연다. 대부분의 전투는 오크의 시점샷이지만 전투의 결판이 나는 장면에서 인간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관객에게 앞으로 이 영화가 어떤 관점을 취하게 될지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크들의 혹성탈출. 굴단의 지옥마법이 어둠의 문을 열고 주인공 듀로탄을 비롯한 오크들의 선발대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아제로스로 향한다. 안타깝게도 좋기만 한 건 이 시작 부분 뿐이었다.
흔히 진성 와우저나 워크래프트1부터 차례차례 플레이해 본 게이머들이 아니라면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할거라고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치 여러 퀘스트를 중구난방 플레이하듯 편집이 성기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딱히 게이머가 아니라도 판타지나 SF작품을 여럿 접해봤다면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세계가 멸망해 이주하려는 다른 세계의 선주민족과 싸우는 이야기라면 워크래프트 말고도 꽤 많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맨 오브 스틸'에서 지구를 테라포밍 하려는 크립톤인들도 있었고, 삶의 터전을 두고 오염시켜야만 살 수 있는 아트만과 정화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이 충돌하는 국산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에서조차도 그런 설정은 볼 수 있었다.
물론 '반지의 제왕'이나 다른 판타지 작품에서 보던 오크 설정과는 다른 오크들처럼 워크래프트 고유의 설정은 살아있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서 벌어지는 대전쟁이라는 기본 설정은 수많은 작품들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기에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을 소수의 게이머들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게다가 영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은 워크래프트 1의 세계관을 베이스로 하지만 캐릭터를 비롯한 많은 설정이 영화화 과정에서 변경되었으니 더더욱 말이다.
워크래프트:전쟁의 서막의 가장 큰 문제는 시네마틱 트레일러로 자신감을 가진 블리자드가 게임 만들기와 영화 만들기를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화면을 통해 본다는 면에서 게임과 영화는 그리 다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두 매체를 통해 얻게 되는 경험은 전혀 다르다.
게임은 시간의 흐름과 즐길 포인트의 통제권이 플레이어 자신에게 있다. 동시에 다수의 퀘스트를 수락해서 어떤 순서로 즐기든, 서사 부분은 스킵하고 PvP만 즐기더라도 플레이어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제각각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의 시간은,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한 상업영화의 시간은 게임과 달리 2시간 전후의 제한을 가지며 순차적으로 흐른다.
게임의 퀘스트에 해당하는 사건의 발생과 서사의 흐름 또한 감독이 촬영하고 영화사가 편집한대로만 볼 수 있다. 그런데 블리자드와 와우저라는 감독은 영화 속 시간을 게임처럼 만들어 채워넣었다. 이미 워크래프트 세계관을 알고 있는 게이머들만 상대하겠다는 듯 서사와 캐릭터간의 관계를 중간 중간 스킵해놓았다. 와우저들은 자신들이 모에하는 캐릭터와 세계관 요소에 감동할 수도 있겠지만 판타지 장르에 익숙한 관객은 어림짐작으로 겨우 따라가게 만들고, 그 이외의 관객은 그나마도 따라가기 어렵게 만든다.
욕심이 앞서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와 설정을 쑤셔 넣은데다 편집마저 툭툭 끊기다보니 서사의 흐름은 지지부진하고 캐릭터의 흡인력은 떨어진다. 게임을 통해 배경지식을 확인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버티기 어렵다.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시사회 직후 나온 평들이 게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호평이,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악평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또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이유 중 하나는 이해의 문제보다 기준의 문제도 크지 않았을까? 이미 게임을 즐기고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야 그 시절보다 예산이나 기술 모두 압도적으로 발전한 CG로 그려진 스톰윈드와 아이언포지의 등장 자체만으로도 감동의 물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주로 즐겼던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또 하나의 판타지 영화로 비춰졌을 것이다. 플레이했던 게임의 체험이 주는 감동이 없으니 이전에 본 다른 영화들을 기준으로 삼게 된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미나스티리스나 모리아, 바랏두르에 비교해 어딘가 허전하다. 아무래도 판타지 장르 영화의 기준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반지의 제왕이기 때문이다.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에 등장한 무기와 장비들은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웨타에서 제작했다고 하는데, 때문인지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가 본격 공개되기 전 프로도 같은 호빗이 지나치게 미형으로 그려졌다는 등 톨키니스트들의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피터 잭슨과 영화사는 원작과는 다른 변경점들을 그대로 밀어붙였고 대성공을 거뒀다. 반면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도 게임과 비교해 많은 변경점들을 가졌지만 이 변경들이 딱히 대중성을 늘렸거나 서사를 더 좋게 만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가로나를 필두로 변경점들이 이야기를 우습게 만들거나 이상하게 만들었다.
여기까지 오면 게임처럼 영화도 서사 부분을 스킵해버린 셈이니 액션이라도 즐기자라는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서사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그리고 액션이 서사에 봉사하지 않으면 영화에서는 둘 모두 제대로 살아나질 않기 때문이다.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의 액션을 이루는 개별 요소들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다. 호드들의 압도적인 육체로 육박하는 몇몇 전투씬이나 공중에서 쇄도하는 그리폰 라이더 로서의 돌격 등은 액션의 백미였다. 하지만 퀄리티 있게 매만져놓은 캐릭터들도 허섭한 서사 속에서 낭비되고 만다. 가장 극명한 사례로 아무리 칼이 영 좋지 못한 곳을 스쳤다지만 로서와 블랙핸드의 막고라가 그 한방으로 어이없이 끝나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블랙핸드는 굴단의 지옥마법으로 버프까지 받은 상태였는데 말이다.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서가 이길 수 있다는 최소한의 단서도 깔아놓은 적이 없다.
뛰어난 개별 CG 효과와 특수분장도 진영에 따라 퀄리티 차이가 심하다. 오크, 드레나이 등의 CG와 특수분장은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난다. 문제는 얼라이언스다. 워크래프트2: 어둠의 물결 오프닝에서나 보았던 마력 작동 시 빛나는 눈을 20년이 지난 지금 영화에서까지 똑같이 재현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무슨 블루투스 작동 램프마냥 엘프나 메디브, 카드가 같은 마력을 가진 존재들이 마법을 쓸 때마다 눈이 빛나는 연출은 안 그래도 어색한 얼라이언스 캐릭터들을 우습게 보이는데 일조했다. 그래서 마법사들의 멋들어진 마법진과 마법 효과가 더욱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과 블리자드는 영화에 어울리는 좀 더 다른 방식의 연출을 찾아봤어야만 했다.
그리고 얼라이언스 종족들을 실사 배우들이 연기하는 탓에 생기는 문제인데, 블리즈컨 코스프레만도 못한 하이엘프들은 그렇다 치자. 어느 배경이든 CG 처리된 캐릭터인 호드가 등장할 때는 문제없으나 얼라이언스의 실사 캐릭터들만 등장하면 배경에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해 위화감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을 두고 배우가 등장하는 게임 광고를 보는 것 같다거나, 게임 방송을 보는 것 같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닐까?
이래서는 차라리 오버워치 단편 애니메이션의 성공 사례도 있으니 풀 CG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것은 어땠을까 싶다. '토이스토리3', '겨울왕국', '주토피아' 등의 사례를 보면 이제는 딱히 CG 애니메이션이라고 해서 흥행에 제한이 있는 시대도 아니니까 말이다.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캐릭터인 쓰랄과 아서스를 다룬 부분부터 시작하지 않고 굳이 시리즈 맨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만드는 것을 고집한 것도 다소 의아한 부분이다. 아무리 시리즈화를 염두에 두었더라고 하더라도 스타워즈나 기타 성공한 프랜차이즈들을 보면 가장 먹힐만한 포인트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다.
서사 그 자체로 구약성경의 모세와 같은 쓰랄을 보더라도 그렇다. '십계', '이집트의 왕자', '엑소더스:신들과 왕들' 등 영화사에서 무수하게 만들어진 모세와 십계의 이야기도 굳이 창세기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사실 워크래프트 세계관은 실제 우리의 역사와는 반대로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을 모티브로 한 듯한 오크가 백인들이 사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침략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역발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좋은 소재와 서사를 발굴할 수도 있었다.
블리자드 게임 영화화의 문을 연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은 안타깝게도 그동안 멋들어졌던 시네마틱 트레일러와 달리 어설픈 시네마틱 팬서비스(?)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에서의 기록적인 흥행 덕에 실패는 면하게 되었지만 영화화를 계속할 것이라면 후속작부터는 좀 더 매체간 차이를 연구하여 영화다운 영화 만들기에 힘써줬으면 좋겠다. 적어도 영화 GV 시간에 감독과 제작자로부터 "Stay awhile and Listen"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는 말이다.
* 본문의 내용은 게임포커스 리뷰어 Sion님이 기고하신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리뷰를 가필, 수정한 것으로 게임포커스 편집부의 편집 방침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필자 프로필
닉네임 Sion. 영화, 서브컬쳐 칼럼니스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덕후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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