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스포츠는 10대부터 프로가 가능하지만 e스포츠는 불가능합니다. 아마추어는 없고 프로만 있는 기형적인 구조의 문제점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네요"
최근 아마추어 e스포츠 경기에서 만난 모 감독이 한숨을 길게 쉬며 현 e스포츠 산업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e스포츠가 시작된지 20여 년. 전세계적으로 e스포츠 산업은 해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e스포츠 산업의 성장에 비해 여전히 국내 e스포츠 산업은 제자리 걸음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전히 국내 선수들의 기량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선수들을 뒷받침 할 인프라는 외국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 이미 e스포츠 종주국의 지위는 중국 등에 빼앗긴지 오래다.
모 e스포츠 관계자는 "국내에서 더 이상 페이커가 나올 수는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e스포츠의 종주국이자 e스포츠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e스포츠 시장은 왜 제자리에 머무는 것일까. 한국 e스포츠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부 구단과 프로게이머에 투자 집중, 중간이 없어진 시장
아직도 게임을 '애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프로게이머를 '애들이나 하는 별것 아닌 직업'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이제 많지 않다. 게임산업의 발전을 통해 생겨난 e스포츠 산업은 '프로게이머'라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냈고 e스포츠 산업이 성장하면서 이제 프로게이머는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업 중 하나가 됐다.
이처럼 프로게이머가 선망의 직업이 되는 등 e스포츠 산업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e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도 늘어나고 있지만 문제는 이들 투자가 대부분 프로 시장에 집중된다는 것. 프로 시장을 지탱하고 프로 선수를 배출하는 기반이 되고 있는 아마추어 시장에는 제대로 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프로시장에 대한 투자도 일부 유명 선수나 1군 위주로 진행되면서 2군 선수나 연습생들은 열악한 환경속에 놓여 있는 경우도 많다.
게임이라는 특수성을 십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아마추어 유소년 단계부터 체계적으로 프로 무대를 준비하는 정통 스포츠와 비교하면 한 없이 열악한 상황인 것.
사실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게이머들이 모여 있는 한국이지만 일반인이 프로게이머의 자격을 갖추는 것은 절차상으로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한국 e스포츠협회의 규정에 따르면 프로게이머는 협회의 공인 게임대회에서 연2회 이상 입상(단일 대회 8위 이내, 리그 대회 16위내 입상자)을 하면 대상자가 되며 여기서 소양교육을 이수하면 프로게이머로 등록된다. 입상을 했지만 프로게이머 등록 절차를 밟지 않으면 준프로게이머가 되며 예외적으로 프로게임단에서 추천한 아마추어 및 준프로선수가 소양교육을 이수하면 프로게이머로 승격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순수 아마추어가 협회 공인게임대회에서 연 2회 이상 프로게이머 자격이 주어지는 순위 내에 입상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한 간신히 입상을 했다고 하더라도 프로게이머로서 데뷔, 구단에 입단해 각종 리그 경기에 출전하기까지는 많은 장벽이 존재한다. 실제로 같은 프로게이머라고 할지라도 정상급 프로게이머들과 그렇지 못한 프로게이머들의 실력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에 수준이 낮은 프로게이머들의 경우 경기에 출전할 기회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대기만성'이라는 단어는 e스포츠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 빠르게 콘텐츠가 변화하는 게임의 특수성 때문에 프로 구단들도 처음부터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선수들에게 투자와 지원을 집중할 수 밖에 없고 그럴수록 2군 선수들이나 연습생들의 대한 지원은 줄어들게 되는 것. 차분히 내공을 쌓고 실력을 업그레이드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프로게이머, 연령은 계속 낮아지는데... '셧다운제'로 발목잡힌 꿈나무들
프로게이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어린 아이들에게 최고의 직접 중 하나로 프로게이머가 손꼽히면서 10대 프로게이머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상당수의 국내/해외 프로게이머들의 데뷔 연령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또한 사회적 인식 개선으로 인해 가족이나 학교(마이스터고 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처럼 프로게이머의 재능을 가진 청소년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이들을 위해 가정과 학교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황이지만 정부의 정책은 여전히 e스포츠 시장의 발목을 잡는다.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지난 2012년 ‘스타크래프트2’ 경기도중 벌어진 한 프로게이머의 이른바 ‘셧다운제 강제 패배’는 이러한 제도의 열약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논란이 거세지자 결국 친권자의 동의가 있을 경우 예외적으로 셧다운제를 제외하는 조항을 새롭게 만들었지만 이 예외조항으로 인해 셧다운제는 제도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게 됐다는 또 다른 비판을 받게 됐다. 끝없는 논란 속에서도 셧다운제의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지난 4월 초 '셧다운제'를 현행 유지하기로 결정했지만 최근 정부가 셧다운제의 완화를 약속하면서 향후 셧다운제 어떻게 바뀔지도 주목된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게임사들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글로벌 e스포츠 리그의 참가 제한 연령을 만17세 이상으로 규정하면서 상당수의 프로게이머 지망생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리그의 경우 셧다운제가 적용되는 10시 전 모든 경기가 종료되지만 한국과 시차가 발생하는 해외 리그의 경우 경기에 따라 제도의 적용 대상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경기 참가에 제약이 걸리게 되는 것.
국제적으로 셧다운제를 실행 중인 국가는 셧다운제가 한국을 포함해 베트남(22시~8시)과 중국(0시~8시) 등 3개국(태국은 폐지)이지만 이들 국가는 셧다운제가 유명무실해 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법령이 강제되지 않는 미국과 영국의 경우는 정부와 민간기구가 협력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결국 e스포츠의 연령 제한은 e스포츠 시장에서 가장 높은 영향력을 갖고 있는 한국과 중국의 선수들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불합리한 이런 제도로 인해 실력이 있지만 프로리그에 참가할 수 엇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고 심지어 예선전에는 별다른 규정이 없어 경기에 참가했다가 본선 규정의 연령 제한에 걸려 진출이 무산되는 사례도 발생한 바 있다.
연습생 싫다... 해외로 떠나는 선수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프로게이머 자격을 얻었다고 해서 모든 프로게이머들이 구단에 소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스포츠 구단들의 선수 수급은 비교적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같은 팀의 선수가 추천을 하거나 코칭 스텝이 직접 게임 플레이를 눈여겨본 선수들에게 입단 시험을 제안하고 여기서 통과되면 팀에 합류하게 되는 것.
그러나 입단 시험에 통과했다고 바로 현역 선수로 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입단 선수 대다수가 연습생, 혹은 2군 라인업에 합류해 선수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입단한 선수들이 최근 사회적으로도 논란이 됐던 이른바 '열정페이'로 선수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 다수의 프로팀에서 연습생을 경험해본 아마추어 A선수의 제보에 의하면 프로구단 2군의 경우 한 달 약 100~120만 원, 연습생의 경우 30만 원~50만 원 사이의 급여(혹은 계약금)를 받는다. 그러나 이 적은 금액마저도 숙식 제공을 이유로 아예 지급하지 않는 팀이 상당수며 만15세 미만은 기량과 상관없이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입단조차 제외된다. 약 20년 전 1세대 프로게이머들이 단칸방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연명하며 1등이 되기 위해 연습했던 그때의 문화와 관습이 지금까지 형태만 달리진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프로 2군이나 연습생들의 이런 열악한 상황과 관련해 선수들과 구단의 입장은 판이하게 엇갈린다. 구단은 연습생이라는 존재를 투자로 생각한다. 해당 선수들이 보석이 될지, 원석으로 남을지, 아니면 돌멩이가 될지 알 수 없는 불안정성을 감수하면서 출혈을 감수하면서 선수들에게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 또 해외와 달리 상대적으로 열약한 국내 구단의 재정적 문제(게임단 스폰서에 대한 사회적 인식으로 인한 투자 거부 및 감소)로 인해 연습생은 물론 2군을 운영하는 것도 사실상 매우 어렵다는 것.
물론, 연습생들의 입장은 다르다. 실력을 인정받아 팀에 입단했는데 셧다운제로 인한 연령 제한 문제로 대회 출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프로선수들의 끝없는 연습 상대로서 수명을 다한다.
1군 선수들 마저도 게임의 핵심(메타)이 바뀌면 언제 출전 기회를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하루 1군에 올라가기만을 기다리는 연습생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훨씬 클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오랜 기다림 끝에 자격이 주어졌지만 게임의 메타가 바뀌고 안정되지 못한 고된 연습생 생활로 건강이나 재정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선수들이 프로게이머를 포기하거나 연령 제한이나 상대적으로 제약이 적은 해외 리그로 눈을 돌리는 경우도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명 게임의 아마추어 리그가 열리면 헤드헌터들이 가장 먼저 접촉하는 대상이 바로 한국과 중국의 아마추어다. 특유의 성실함과 승부욕 때문에 비교적 적은 가격으로도 쉽게 스카우트에 성공한다는 것.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한 한국 e스포츠 시장
세계 최초로 e스포츠가 시작된 나라, 그리고 세계 최고의 e스포츠 선수를 가진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에 이견을 나타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이 최고의 e스포츠 국가냐고 묻는다면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규제 중심의 법안, 게임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정부, 프로의 성장을 뒷받침해 줄 아마추어 리그의 부재, 스폰서십이 활성화 되지 않는 보수적인 사회의 시각 등 복합적인 문제로 인해 성장을 멈춘 사이 북미와 중국, 동남아 지역에는 정교한 스폰서를 갖춘 기업형 아마추어와 프로리그가 생겨나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한국 e스포츠협회가 추진중인 국제화 e스포츠화를 반대하며 별도의 국제 e스포츠협·단체 설립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e스포츠 업계 일각에서는 e스포츠 산업과 관련한 각종 규제나 제도의 개선이 아닌 개혁 수준의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e스포츠 업계 관계자는 “선수 육성의 문제와 e스포츠 리그의 국제화 등 산적한 e스포츠 과제와 관련해 정부와 주무부처, 게임사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탁상공론이 장기화되면 e스포츠 팬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e스포츠의 정식 스포츠화 및 글로벌화는 커녕 e스포츠의 종주국 자리마저 내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어느 때 보다 e스포츠 산업에 대한 정부와 관계기관 업계의 협업이 필요한 시기다. 과연 한국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글로벌 e스포츠 시장에서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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