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역사를 바꾼 전장, 아우스텔리츠 1부
190여 년 전.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러시아의 동토에서 한 사람의 군인이 썰매를 타고 진영을 떠나가고 있었다.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고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썰매. 군대에서 사람이 오가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현실 속에서 그것은 그다지 대단한 사건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화려하거나 엄숙한 장면도 아니었지만, 바로 그 순간 유럽의 역사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썰매를 타고 아군의 진영을 도망치듯 떠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의 중요성으로 때문이었다.
파리로 떠나는 장군. 그것은 그의 몰락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는 장교 중에서 특히 작은 키에 속하는 소유주였다. 말 위에서는 엄숙하고 멋지게 보였지만, 파티장이나 군중 속에서는 묻혀서 드러나지 못하는 존재. 팔다리는 병자처럼 말랐으면서도 몸만은 오동통해서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 하지만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 아니 바로 그 순간에도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패자이자, 황제(L'empereur), 그리고 로마왕의 명칭을 지닌 인물이었다. 코르시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난 촌놈으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황제의 자리를 쟁취한 영웅,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였던 것이다.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그는 키도 별로 크지 않고 왜소한 체격의 존재였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그는 처참한 패배자로서 쫓기고 있었다. 끝까지 그를 신뢰하며 따라왔던 병사들을 버린 채… 그리고 이것이 유럽의 정복자이자 전술의 천재 나폴레옹 몰락의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워터루 전투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모든 것을 잃고 세인트헬레나라는 작은 섬의 이름뿐인 황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너무도 당당하게 시작되었던 러시아 원정. 그것은 나폴레옹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낳았고, 그의 인생 최악의 실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지극히 불운한 것처럼 보이는 그 패망에 전기가 되는 사건이 존재했으니,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 자신만이 아니라 적군마저도 "불멸의 승리(참패)"라고 선언한 아우스텔리츠 전투였다.
■ 화려한 출진, 그리고 영웅의 추락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강대한 정복자였다
러시아의 차르는 프랑스와 손을 잡았지만, 약속을 저버리고 영국과 계속 교류했다
대군. 그들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1812년 12월 5일. 그야말로 죄인처럼 신분을 감추고 도망치기 직전까지 그는 거의 50만에 이르는 대군(大軍, La Grand Armée)을 이끌고 있는 위대한 정복자였다. 1812년 3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러시아에 대한 응징을 선언하며 군대를 집결시킨 그는 동맹국인 오스트리아군단을 포함 12개 군단 47만 2천명에 이끄는 대군(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인해 그들 대부분은 -나폴레옹 자신도 풋내기라고 말했듯- 어린 신병에 지나지 않았고, 그만큼 군인으로서의 경험이나 자질도 부족했다. 게다가 20여개 국에서 강제징집했기 때문에 진군 도중 탈영자들도 수없이 생겨났다)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의 탁월한 병참술로 전군은 정확한 날짜에 니만강에 집결하였고 강을 넘어 3000km의 고된 여정을 헤쳐나간 그들은, 보로디노에서 러시아의 노장 미하일 쿠투초프(М.И. Кутузов)가 이끄는 12만 명의 방어군과 마주쳤다.
강을 건너는 프랑스군. 작전은 모두 완벽해 보였다
보로디노 전투. 두 군은 엄청난 격전을 벌였다
당시 고된 행군 속에 연이은 탈영과 군의 분산 배치로 나폴레옹 휘하에 남은 것은 13만 4천명. 도합 25만의 대군이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정면 격돌이었다. 제1군단장 다부는 적의 좌익에 주력을 집중할 것을 제안했으나 묵살 당했고 평소의 나폴레옹답지 않았던 혼전은 러시아 4만, 프랑스 3만. 도합 7만에 이르는 손실을 입고 종식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전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군이었다. 러시아군은 용감하게 저항했으나, 한때 거의 파멸적인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심장부에 칼을 꽂기 위해서는 예비로 남겨둔 그의 근위대까지 동원해야 했기에, 결국 나폴레옹은 이 결정을 포기하고 말았다(이것은 젊은 날의 나폴레옹이었다면 절대로 저지르지 않았을 결정적 실수였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물러나는 가운데 9월 15일.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크레믈린에 입궁하였다.
곰에게 찢기는 악몽을 꾼 나폴레옹. 그리고 그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역사상 몽골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차르의 궁전에 깃발을 꽂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 승리 선언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 2년에 걸쳐 러시아 원정을 계획하면서 계속되었던 나폴레옹의 악몽은 그날로 종식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울분을 머금고 모스크바를 떠나야 했던 67세의 노장 쿠투초프는 결코 상황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그의 악몽은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형태로 드러났다. 바로 그날 밤, 모스크바 각지에서 불길이 치솟은 것이다.
그것은 쿠투초프에 의해 시행된 초토 작전의 결과였다. 그는 러시아군의 후방 병력 만이 아니라 잡다한 죄인들도 풀어서 이 작전을 수행토록 했고, 갑작스럽게 불어온 북풍으로 인해 모스크바의 목조 건물은 반 이상 불타오르고 말았다.
모스크바의 불길. 그것은 프랑스군의 마음을 불살랐다
병자로 밖엔 생각되지 않는 노장, 쿠투초프. 그는 확고한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것은 모스크바에 남겨진 보급 물자를 전소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고 최소한 6개월 치는 된다고 알려진 식량과 의복 상당 수는 화마를 모면하고 남았다(그리고, 이는 -탈영과 분산 배치로 인하여- 10만으로 줄어든 대군이 당분간 지내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후일 "왕궁, 사원, 미술적 기념물, 고대, 근대의 건축물, 조상의 분묘 및 아동의 요람은 모두 소실되었다"고 평가된 쿠투초프의 초토 작전은 한편으로 큰 소득 없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물론 굶주리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초토 작전의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점차 문란해지는 군기로 인한 보급 실수로 식량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식량이 남아돌고 다른 쪽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는 다시금 군기를 더욱 무너지게 만들었다).
불길에 휩싸인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은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초토 작전은 다른 면에서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당초 불길을 본 나폴레옹은 이성을 잃고 "러시아인은 생존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라며 닥치는 대로 약탈할 것을 선언했는데, 이로서 한때 프랑스군을 환영하기도 했던 시민들은 완전히 적으로 돌아서버리고 만 것이다. 그 후 이성을 되찾은 나폴레옹이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을 약속했지만, 이미 그를 바라보는 시민의 눈길은 차갑게 변해 있었다. 적대적인 시민들 사이의 주둔군. 그리고 화재로 인하여 사라지고 점차 줄어들어가는 보급 물자, 신병들로 가득한 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기강이 문란해진 가운데 그들은 약탈군으로 변신하고 말았고, 이들을 다스려야 할 고급 장교들은 향락만을 일삼으며 '대군'은 점차 무너져만 갔다.
한편, 대군의 상황을 통제해야 할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사자를 보낸 가운데 허송세월 만 보내고 있었다. 그는 한때 친우이기도 했던 러시아 황제가 자신에게 굴복하리라 생각했고 즉각 철군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루이 다부. -대머리긴 하지만- 나폴레옹 진영의 가장 젊고 유능한 장군인 그의 조언을 따랐다면, 러시아 원정의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 달 여의 시간이 흐르면서 나폴레옹은, 철수에 대한 유혹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다부는 "군마를 죽여서 먹는 한이 있더라도 내년 봄이 될 때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러 병사들을 휴양시키십시오"라고 건의했다. 점차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며 이동을 위한 보급 물자가 충분치 않다는 것을 고려하면 고려할 가치가 있는 의견이었지만, 나폴레옹은 본국과 연락이 두절될 경우 동맹군이 이탈할 것을 우려하며 이를 기각했다. 그리고, 10월 18일 러시아군의 기습으로 뱐코보에 위치한 프랑스 예비 기병군이 보로노로로 퇴각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나폴레옹은 그 즉시 철수를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날 주력군이 떠난 가운데 나흘 후, 모르티에가 이끄는 청년 근위대가 모스크바를 출발함으로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은 결국 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식량보다는 약탈품을 든 군대. 그들은 이미 병사가 아니었다
각지에 흩어진 군을 규합하며 후퇴를 시작한 대군. 그러나 그들은 이미 군대라기보다는 산적떼나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를 떠날 당시 나폴레옹은 개인 식량으로 60일분을 확보토록 강조했지만, 장병들은 약탈품으로 가득 찬 주머니만을 채웠을 뿐 진정으로 필요한 식량은 준비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식량 자체가 많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약탈품에 파묻혀 뒤뚱거리기는 했으나 장병들 역시 굶주리기는 싫었던 듯 어느 정도의 식량 정도는 챙겼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식량을 수송하기가 힘들었다는 것(그리고 약탈품으로 인해 병사들의 발걸음이 무거웠다는 것)이었다.
철군 초기의 날씨는 -후일 나폴레옹이 말했듯-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기온은 0도 주변을 맴돌고 있었고 때때로 내리는 비와 눈으로 인해 길은 질퍽거렸다. 약탈품으로 가득한 수레가 나아가지 못하면서, 우선 말들을 위한 먹이가 부족해졌고 고된 행군 속에 굶어죽은 군마는 여기저기 버려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수송 수단을 잃은 병사들은 눅눅한 군화를 신은 채, 그리고 수많은 짐을 짊어진 채 하염없이 걸어야만 했으며, 그것은 -점차 부족해지는 식량과 더불어- 그들의 저항력을 떨어뜨림으로서 결국 병을 가져왔다(이와 관련해서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았기 때문에 추위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지만, 이는 지치고 배고픈 상황에서는 영상의 기온이라도 춥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한 '따뜻한 방안에서 생각하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패배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인 군마의 먹이 역시 날씨가 좋았다면 -그래서 도로 상태가 괜찮았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물론, 패전의 가장 큰 -그리고 진정한- 원인은 병사라고 할 수 없는 풋내기들을 이끌고 무리한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의 판단 착오였다).
진창 속에서 마차도 말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게다가 쿠투초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그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침략자를 물리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러시아군과 도적떼로 변한 프랑스군. 승패는 누가 보아도 명백한 것이었지만, 쿠투초프를 비롯한 러시아 장성들은 나폴레옹의 명성에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었고 프랑스군의 병력을 오판하여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기에, 프랑스군의 철수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 군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니만강의 가교. 그 예술품과 같은 다리는 결국 러시아군에 의해 태워지고 말았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무너졌다. 코사츠 기병의 습격 때문이 아니라, 단지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단지 추위로 얼어 죽은 게 아니라 굶주림으로서 인해(그리고 병에 걸린 채) 지쳐갔으며 쓰러진 채 얼어붙었다(그 중 많은 이들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추위 속에 나폴레옹은 '이제는 더 이상 대군이라 부를 수 없는' 초라한 패잔병의 무리를 떠나 홀로 파리로 돌아왔다(그 후, 병사들은 지금은 리투아니아의 수도가 된(그러나 당시엔 인구 3만도 되지 않았던) 빌뉴스라는 작은 도시에 남쳐진 채 결국 병과 추위, 그리고 굶주림 속에 쓸쓸히 죽어갔다. 당시 마을 인구보다 많은 시신으로서… 그리고 본래 그들이 팠던 참호에 무더기로 묻힌 채 최근에서야 -도로 공사로 인해- 발굴되었고 드디어 국립 묘지로 안장되었다).
수없이 많은 시신이 참호에 파묻혔다
자신을 신뢰하며 마지막까지 따라가리라 맹세했던 병사들을 버리고 홀로 도망친 나폴레옹. 과연 그 순간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잘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는 불과 수 년 전에 같은 시기에 있었던 한 전투를 떠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승리를 가져온 그 순간을…
-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