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공상 과학물(SCI-FI, SF)'의 전성기다. 특히 전후부터 2000년대까지의 일본에서는 SF 특유의 세계관에 외계인의 침공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담은 묵시록적인 성격을 담은 작품들이 자주 등장했는데, 아마 1945년 전쟁에서 참패를 겪었던 당대의 사회 분위기가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시대를 풍미했던 공상 과학물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과학 기술이 워낙 발전한 탓에 외계의 존재나 첨단 기술 정도로는 소년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장르 자체가 쇠퇴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에 공상 과학물이라는 장르 또한 케케묵은, 그러면서도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화 코드가 되어버렸다.
바닐라웨어가 개발하고 세가퍼블리싱코리아가 국내에 한국어 번역판으로 정식 발매한 어드벤처 게임 '13기병방위권'은 바로 20세기를 풍미한 공상 과학물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작품이다. 게임은 시간 여행과 거대 괴수, 로봇 등 20세기 공상 과학물의 단골 소재들을 13명의 주인공의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있다.
바닐라웨어 특유의 미려한 그림체도 좋지만 '13기병방위권'의 진짜 매력은 치밀하게 짜여진 시나리오에 있다. 13명의 이야기가 서로 정신없이 교차하지만 어디서부터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더라도 즐거운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다만 게임의 스토리가 뒤죽박죽이기 때문에 깔끔한 이야기 전개를 선호한다면 구매 전에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20세기 SF 명작에 대한 애정 가득
'13기병방위권'은 거대 괴수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13인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거대 괴수와 로봇의 대결이라는 익숙한 소재 이외에도 20세기를 풍미했던 SF 고전 명작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설정들이 곳곳에 녹아있다. 'ET'나 '우주전쟁'부터 '신세기 에반게리온', '맨 인 블랙' 등 20세기를 풍미했던 작품 이외에도 '소스코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등 비교적 근대 작품의 흔적들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오마주로 점철된 작품이라면 일본 현지에서 발매 당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을 터. '13기병방위권'은 고전 명작들의 익숙한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이를 게임 만의 독특한 문법으로 해석해 새로운 느낌을 준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설정”과 “이렇게 연결되는구나”라는 두 가지 감정이 서로 뒤섞이는데, 총 25시간 분량의 플레이 타임 내내 복선을 두고 펼쳐지는 게임과 플레이어의 '밀당'이 정말 흥미진진하다.
게임의 이야기는 5개의 시간대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간대도 있어 우익 관련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 탓에 게임의 구매를 망설이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걱정이 민망할 정도로 게임 상에서는 해당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의 분량이 적다.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SF 장르 특유의 상상력에 기반해 당시의 시대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려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복잡하게 얽힌 13인의 이야기, 탐구편으로 복선 놓치지 말자
게임은 크게 전투 파트인 '붕괴편'과 스토리를 파헤치고 진상에 다가가는 '회상편' 및 '탐구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붕괴편'은 작중 '회상편'이 모두 마무리된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면밀한 연결고리가 있는 편은 아니며, 결국 게임의 주된 복선을 풀고 회수하는 것은 '회상편'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 이외에도 꿈, 전생, 청춘 로맨스, 루프물 등 SF의 필수적인 소재들이 담긴 것은 물론, 여느 어드벤처 게임과 비교해도 많은 수의 13인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탓에 최후반부로 들어서기 전에는 전체적인 이야기의 가닥을 잡기 어렵다. 다행히 '회상편'에서의 진도에 맞춰 '탐구편'에서 친절하게 설정을 비롯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주기 때문에 어려운 이야기를 따라갈 자신이 없는 사람들도 충분히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게임 내에서 13명의 이야기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게임 내에서 요구하는 시나리오 해금 조건을 달성하기 전에는 특정 부분에서 시나리오가 막히기는 하지만, 그 전까지는 13명의 이야기를 서로 오고 가며 자유롭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플레이어의 취향이나 플레이 패턴에 따라 전혀 다른 시점에서 정보를 얻거나 진상을 파악할 수도 있는데 어떤 순서대로 게임을 플레이하더라도 비슷한 시점에서 실마리를 얻거나 반전이 튀어나와 흥미롭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해외에서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라면 반드시 '13기병방위권'을 플레이해야 한다고 극찬한 것 역시 이런 이유로 보인다. 최근 발매되는 게임들이 플레이어가 진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하기 위해 게임 내에서 직접적인 정보를 풀어내지 않거나 단편적인 사실을 제공하고 플레이어가 스스로 추리해야하는 가운데, 모든 복선과 진상을 해설하는 고전적인 방법을 선택했음에도 긴장감과 반전의 재미를 제대로 살린 '13기병방위권'의 시나리오는 분명 인상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조금은 심심한 '붕괴편'
'회상편'에 대해서는 감히 역대급 어드벤처 게임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전투 파트인 '붕괴편'의 재미는 조금 미묘하다. 그동안 횡스크롤 액션 게임을 주로 개발하던 바닐라웨어가 탑 뷰 시점의 방어 시뮬레이션 게임에 도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지만, 완성도 자체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플레이어에 따라서는 '붕괴편'이 게임의 흐름을 끊는 방해 요소로도 느껴질 수 있겠다.
'캐주얼'부터 '스트롱'까지 3단계의 난이도를 제공하지만 기병만 적당히 강화하면 난이도의 체감 상승 폭이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등장하는 적의 물량이나 체력 등이 높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전투가 늘어진다는 기분. 각종 화기를 동원해 괴수를 일망타진하는 연출 자체는 볼만 하지만, 열심히 흔들리고 터져나가는 화면에 비해 플레이어가 쥐고 있는 패드는 조용하다는 점도 불만이다. 진동 정도만 넣더라도 손맛이 한층 배가될 것 같다.
유독 '붕괴편'에서만 프레임 드랍 현상이 심하다는 점도 '13기병방위권'의 아쉬운 부분이다. '붕괴편' 후반부로 들어설수록 등장하는 적 괴수의 물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기자가 사용한 '플레이스테이션4 슬림'뿐만 아니라 전 기기에서 프레임 드랍 현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밀한 조작이 필요하지 않은 시뮬레이션 장르라는 점은 다행이지만 기껏 '회상편'으로 쌓아 올린 게임의 평가를 '붕괴편'이 깎아 먹는다는 점은 아쉽다.
20세기 SF물에 대한 헌사 '13기병방위권'
'13기병방위권'은 13인이라는 대규모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며 장대한 진상에 다가가는 과정을 그린 어드벤처 게임이다. 거대 괴수에 맞서 로봇을 타고 싸우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무난한 SF물을 연상할 수 있지만, '13기병방위권'은 단순히 거대 괴수와 로봇 이야기 이외에도 20세기를 풍미했던 SF물에 대한 헌사에 가깝다. 오마주를 알면 알수록 게임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으며, SF물에 대한 전반적인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치밀하게 구성된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재미만 느껴도 충분하다.
다만 진상을 파헤치는 것이 목적인 게임 특성상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다 보니 조금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점은 구매 이전에 주의가 필요하다. 물론 '탐구편'을 통해 새롭게 밝혀지는 진상이나 복선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진실에 도달하기까지의 반전들이 흥미로우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여기에 전투 파트인 '붕괴편'에 대해 플레이어의 취향이 크게 갈릴 수 있으니 체험판을 먼저 플레이해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겠다.
최근 '온라인 탑골 공원'이 유행이다. 어린시절 향유했던 문화 콘텐츠에 소비자들의 관심이 쏠린다는 것인데, 각종 첨단 기술이 등장하고 생활상이 발전함에도 사람들은 자꾸만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여러모로 시기가 적절한 게임이다. 스토리 중심의 게임을 선호한다면 '13기병방위권'을 꼭 플레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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