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날씨의 아이'는 계속 진보하고 있는 신카이 마코토가 '너의 이름은.'에서 또 한걸음 나아간 경지

등록일 2019년11월01일 09시30분 트위터로 보내기
 
* 아래 리뷰 내용에는 '날씨의 아이'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의 이름은.'으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된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는 한일 양국에서 기록적인 흥행을 한 '너의 이름은.'의 차기작인만큼 애니메이션 업계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과연 기대했던만큼의 결과물이 나왔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의 흥행과 대중성을 발판 삼아 한 단계 진일보한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날씨의 아이'는 구조적으로는 '너의 이름은.'과 사실상 동일하다. 서로 다른 환경에 사는 남녀 주인공, 생각지 못했던 재해, 주인공이 가진 초자연적 능력, 능력의 키워드가 되는 일본의 전통 문화, 모든 이야기가 도쿄로 수렴되며 남녀 주인공이 재회한다는 것까지 말이다. 여기에 더해 작품을 관통하는 래드윔프스의 노래도 건재하고, 소소하게는 야무진 여동생 요츠하에 이어 등장한 되바라진 남동생 나기가 웃음을 주는 주요한 캐릭터 중 하나란 점도 거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동어반복이나 자기복제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익숙한 이야기와 인물 구조가 관객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이 구조의 반복은 전작보다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날씨의 아이를 관객이 따라오기 쉽게 만드는 가이드라인이 되어준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은.'보다 먼저 개봉했다면, '날씨의 아이'가 일본 국내에서 천만명을 동원하는 기록적인 흥행 영화가 되지는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의미에서 '너의 이름은.' 같은 초대박 흥행작의 후속작이라는 현실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자신이 좀 더 진지하게 하고 싶어하는 이런 이야기를 바로 다음 작품으로 내놓은 감독의 야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든 날씨는 주요한 화두의 하나이다. 올 한해만 따져도 이상기후로 한국에 이제는 아열대처럼 국지성 집중호우가 내린다거나, 태풍 하기비스의 직격을 맞고 큰 수재를 입은 일본, 기록적인 폭염으로 녹아내렸던 프랑스 등의 지구적인 규모의 뉴스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작게는 아마 누구나 소풍날, 수학여행 같은 중요한 날이 되면 그렇게 비가 오더라처럼 신비한 경험담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감독은 누구나 한번쯤은 겪고 생각해보았을 이 날씨와 사람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키워나간다.
 
영상 표현에 있어서도 '날씨의 아이'는 익숙하면서도 '너의 이름은.'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신카이 마코토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하늘과 혜성 그리고 빛이 한가득해 방안에 일어나는 먼지조차 반짝이는 표현이 메인이었다면, 이번 날씨의 아이는 오프닝부터 장대비가 내리는 우중충하고 어두컴컴한 하늘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그 비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리는 한줄기 햇살과 실버라이닝이 역설적으로 아름다움과 감동을 배가시킨다. 비교하자면 이전작들에 비해 자신의 장기를 절제하면서도 쓰는 순간에는 더 큰 대비를 통해 감동의 낙차를 크게 한 셈이다.
 
사실 감독이 빛 뿐만 아니라 비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음은 이전에 중편인 '언어의 정원'을 통해 이미 보여준 바 있다. 아마도 이 느낌을 위해 '언어의 정원'의 미술감독이었던 타키구치 히로시를 다시 한 번 미술감독으로 합류시킨 것이 아닐까.
 


 
표현 면에서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을 '언어의 정원'을 통해 진일보시킨 작품에 가깝다. 여기에 '너의 이름은.'의 타키와 미츠하를 그려냈던 캐릭터 디자이너 타나카 마사요시가 이번에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으며,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원화가였던 베테랑 타무라 아츠시가 작화를 담당해 관객들에게 친숙하면서도 퀄리티 높은 영상을 전하고 있다.
 
아마 '너의 이름은.'이 그런 기록적인 대흥행을 할 수 있었던 공의 상당 부분은 래드윔프스의 노래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너의 이름은.'은 래드윔프스의 뮤직비디오에 가깝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뮤직비디오처럼, 때때로 고전영화의 변사처럼 그들의 노래 가사는 '너의 이름은.' 곳곳의 빈틈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영상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노래 역시 친숙하지만 쓰임새가 다르다. '너의 이름은.'에 비해 '날씨의 아이'에서는 음악, 특히 노래가 절제되어 쓰인 편이다. '너의 이름은.'에서 래드윔프스의 노래가 영화의 전개나 인물의 감정을 거의 1대1로 전달했던 것과는 달리 '날씨의 아이'는 노래가 영화 일선에서 후퇴했다. 대부분의 노래를 후반부 클라이막스부터 엔드 크레딧이 흐르는 부분에 할애했는데 이번에는 노래가 영화의 전개나 감정을 직접 설명한다기보다 노래를 통해 영화 전체의 주제를 되돌아보고 곱씹게 만드는,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의미에서 영화 음악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음악을 위한 영화라기보다 영화를 위한 음악이 되었달까.
 
'날씨의 아이'는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의 복지 사각 지대의 가족 이야기를 그려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도 아베 정권에게 백안시당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처럼 각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현재 일본 사회가 가진 모순들을 의외로 많이 드러내 보인다.
 
섬에서 살다 가출한 주인공 호다카는 돈이 없어 PC방을 전전하다 노숙을 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미성년자인 주인공 히나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유흥업소 일을 기웃거리게 된다. 아동보호소와 경찰은 자기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이지 아이들의 안위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귀사가 제1지망이라며 면접마다 읍소하지만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이 좀처럼 되지 않는 나츠미의 현실은 어떤가. 아이고 어른이고 작품 속 날씨처럼 꿀꿀하고 어두운 현실은 가랑비처럼 배경에 스며든다.
 
호다카가 초반에 가장 많이 반복하는 대사인 "도쿄는 무서워/굉장해"는 어쩌면 이런 영화 밖 현실에 대한 감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에서 보이던 도쿄의 휘황찬란한 아르바이트나 먹기 전에 인증샷부터 찍는 고급 디저트들은 이번에 보이지 않는다. '날씨의 아이'의 아이들은 호텔 자판기의 컵라면과 음료를 마음껏 먹고 마시며 호사라고 생각한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어느 사이엔가 바뀌어 버린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응축해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나기와 나츠미의 도움을 받아 경찰서를 탈출해 히나를 구하러 가는 장면은 그 절정이다. 수해로 복구 중인 철길을 따라 히나를 되찾으러 달려갈 때 주인공인 호다카를 지켜보는 도쿄 시민들은 응원이 아닌 야유나 비웃음을 날린다. 사라진 히나를 되찾기 위해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남주인공의 노력을 비웃는 엑스트라들을 다른 곳도 아닌 클라이막스 씬에서 굳이 등장시키는 건 '너의 이름은.'을 포함해 일반적인 멜로 드라마나 러브 코메디의 문법과는 사뭇 다르다.
 
기본적으로 사랑 영화인 이 작품에서 현실의 가혹함을 클라이막스씬에서 되새기게 만드는 건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인정하라는 메시지인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비웃음을 넘어 먼저 손을 내밀라는 것이 아닐까.
 
호다카와 히나에게 PC방에서나 호스트 클럽 앞에서나 도쿄에서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폐를 끼칠 때만 상대에게 상관을 한다. 아동보호소나 경찰 역시 마찬가지. 가출한 호다카를 거둬줬던 스가조차 결국 자기 자식이 더 중요한 법이지라며 위기에 처한 호다카를 내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냥 지나쳐도 되지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다. 그 내민 손이 지금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섬에서 뛰쳐나온 호다카가 무사히 도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위기의 순간 스가가 내민 손 덕분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호다카의 손을 뿌리쳤던 걸 뉘우치며 히나를 만나러 갈 수 있게 경찰을 막아선다. 아르바이트 중인 히나는 어려운 와중에도 굶고 있는 호다카에게 햄버거를 내민다. 경찰서를 탈출해 히나를 찾으러 달리는 호다카를 향해 바이크를 탄 나츠미가 손을 내민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버린 히나를 되찾기 위해 세계의 모습을 바꿔버리는 걸 감수하고 호다카는 손을 내민다.
 
지금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건 손을 내미는 사람과 잡을 사람 그리고 사랑이라는 듯 래드윔프스는 엔딩인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로 이렇게 노래한다.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도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도 있어"라고.
 


 
'날씨의 아이'는 감독의 출세작인 '너의 이름은.'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소소한 재미이다. '너의 이름은.'의 캐릭터들이 대거 카메오 출연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었던 타키, 미츠하는 물론 친구였던 텟시네 부부와 야무진 동생 요츠하는 많이 커서 개인 하늘을 보며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한다. 감독은 일본 국내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너의 이름은.'과 통합된 세계관은 아닌 패러렐 월드라고 한발짝 물러선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의 주요 인물들의 등장은 카메오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날씨의 아이는 일본 영화 박스오피스 역사를 새로 쓴 '너의 이름은.'의 후속작인만큼 아마 관객들은 극장 문을 나서며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도쿄가 그렇게 되어 버리면 애써 만난 타키와 미츠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그대로 계속 사랑을 할까? 요츠하는 어떤 어른이 될까? 텟시네는 저런 도쿄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너의 이름은.'에서 도쿄는 동경의 대상이자 재해를 피해 주인공들이 해후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날씨의 아이'는 그 도쿄를 과감하게 되돌릴 수 없는 재해의 장소로 택해 사랑을 위해 손을 내미는 아이들을 이야기한다. 보통 이런 사랑 영화에서 주인공이 재회하고 사랑이 이루어졌으면 좋은 기분으로 극장을 나서는 것으로 끝이지만, '날씨의 아이'는 주인공들의 해피 엔딩뿐 아니라 타키와 미츠하를 비롯해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떠올리게 만든다.
 
굳이 일본이 아니더라도 서울에 직격하지 않으면 뉴스 한켠으로 치워지는 지방의 태풍 소식, 주가가 오르고 수출만 흑자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시야에서 치워져버리는 도시 빈민들. 어쩌면 재난 앞에서 평소 떠올릴 생각 좀처럼 못 해봤을 그 누군가에게로 생각의 시선을 자연스레 돌려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번 '날씨의 아이'의 미덕이 아닐까 싶다.
 
감독은 12년 전 '초속 5cm' 내한 GV에서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가 끝나고 극장문을 나서더라도 영화 안의 캐릭터들의 인생은 물론, 당신의 인생도 언제든 어디에서든 계속 된다는 걸 느껴주었으면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날씨의 아이는 여전히 '진보하고 있는'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이다.
 
*** 본문의 내용은 게임포커스 리뷰어 Sion님이 기고하신 '너의 이름은.'의 리뷰로, 게임포커스 편집부의 편집 방침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필자 프로필
닉네임 : Sion
영화, 서브컬쳐 칼럼니스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덕후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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