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당구장은 어떻게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나

등록일 2011년05월20일 15시51분 트위터로 보내기


아저씨들이 뿜어내는 자욱한 담배연기와 곳곳에서 풍기는 싸구려 자장면 냄새, 동네 좀 노는 형들의 집합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당구장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 하는 모범생들은 절대 가서는 안되는 대표적인 청소년 일탈의 장소였다.

다행히(?) 필자는 모범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출입이 금지됐던 당구장을 1990년대 이전부터 드나들었고 이제는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에까지 채택될 정도로 신분이 격상된 당구라는 고품격(?) 스포츠를 비교적 어린나이에 배우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물론 당구를 배운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밑바닥을 헤매는 걸 보니 그다지 소질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듯 불과 20년전만 해도 청소년 유해업소 취급을 받던 당구장의 신분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993년 5월 있었던 헌법재판소의 판결 때문이었다.

1993년 5월 헌법재판소는 그 당시 한 당구장 주인이 낸 '18세 미만자의 당구장 출입금지'와 관련한 헌법소원에서 "당구장에는 18세 미만자의 출입을 금해야 한다"는 문화체육부령의 '체육시설의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시행규칙'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헌법재판소는 판결문에서 "'18세 미만자의 당구장 출입 금지' 법률시행규칙이 다른 체육시설들과 비교해 당구장 이용고객의 평등권을 위배하며, '누구에게나 건전한 체육시설을 서비스 할 수 있는' 당구장 주인들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위헌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다시말해, 국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문화체육시설 혹은 스포츠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가능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결 취지였던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당구장에 붙어있던 '18세 미만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제거되기 시작했고 중고생들이 합법적으로 당구장을 드나들며 '노는 형들이나 즐기는' 음지의 놀이가 아닌 건전한 스포츠로서의 당구를 즐기기 시작했다.

물론,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에도 당구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했으나 대한민국 최고 사법기관의 올바른 판결 덕분에 당구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바뀌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2002년 대한민국 당구사에 기록될만한 기념비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2002년 부산에서 개최됐던 아시안게임에 당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 동네 깡패들이나 즐기던 당구가 양지로 나온것도 모자라 아시안게임의 정식종목까지 채택 될 정도로 품격있는 주류 스포츠로 확실하게 신분상승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김경률, 강동궁, 허정한 등 어린시절 부터 당구를 배운 수 많은 소년들이 20여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당구계를 호령하며 그 어떤 스포츠 종목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한국의 이름을 널리 알리며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

당구의 인생을 20여년만에 이렇게 180도 뒤바꿔 놓은 것은 바로 1993년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그 판결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수 많은 학부모들과 시민사회단체 등 청소년들을 걱정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들의 당구장 출입을 극렬히 반대했으며,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비난했다. 그러나 당구가 나쁜것이 아니라 당구를 나쁜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 환경이 문제라고 판단한 헌법재판소의 시대를 앞서간 명 판결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국내 대표적인 여가 스포츠로서의 당구가 존재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게임은 유해매체이며, 게임을 하면 청소년들의 뇌가 짐승처럼 변하고 그래서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청소년들의 게임을 제한해야 한다는 취지의 온라인게임 셧다운제 법안이 빠르면 올 11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전 세계적으로 건전한 놀이문화로 인정받는 게임이 20여년 전 당구가 그랬듯이 또 다시 유독 대한민국에서만 제대로 된 대접을 못받고 있다. 세계 최고 최대의 박물관인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조차 게임의 역사적, 시대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게임이 걸어 온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전시회를 여는 시대에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청소년들을 해치는 마약과 같은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수면권을 보장하고 건강을 챙기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게임이 아니어도 우리 청소년들을 잠 못들게 하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다. 그들은 왜 유독 게임에만 그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하는 것일까.

만약 20여년전 당구장 문제처럼 온라인게임 셧다운제가 헌법재판소를 가게 된다면, 과연 오늘날의 헌법재판소는 이 온라인게임 셧다운제에 어떤 판결을 내리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취재기사 기획/특집 게임정보

화제의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