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적인 콘텐츠로 글로벌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넷플릭스가 지난 3월 단편 애니메이션 모음집 '러브, 데스+로봇' 프로젝트를 공개해 호평을 이끌어냈다. '러브, 데스+로봇'은 '파이트 클럽'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연출한 데이빗 핀처 감독과 '데드풀'로 이름을 알린 팀 밀러가 힘을 합친 프로젝트로, 현재 넷플릭스를 통해 모든 에피소드를 만나볼 수 있다.
기자가 '러브, 데스+로봇' 중 가장 인상깊게 감상했던 에피소드는 영국 식민지배하에 놓인 홍콩을 배경으로 마법의 힘을 잃은 구미호가 전신을 스팀펑크로 대체한 '사이보그 구미호'가 되어 남자들을 사냥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굿 헌팅'이다. 동양적인 설화 소재인 '구미호'와 서양의 '스팀펑크'가 결합된 매력적인 비주얼과 미려한 2D 애니메이션이 특징인데, '굿 헌팅'을 제작한 것이 국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레드독컬처하우스'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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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독컬처하우스'는 2014년 7월 4명의 구성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약 67명 규모로 성장한 국내 2D 애니메이션 전문 스튜디오로 '메이플스토리', '테일즈위버', '아르피엘', '오버워치', '히어로칸타레' 등 인기 게임 PV 영상에도 다수 참여했으며 드림웍스에서 진행한 '볼트론' 코믹스의 영상화 작업 및 네이버의 '연애 하루 전' 같은 큰 회사의 프로젝트도 진행한 바 있다.
국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글로벌 거대 기업 '넷플릭스'의 도전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기획과 시나리오를 전부 완성하고 애니메이션 작업만을 맡기는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세스와 달리, 기획단계부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참여해 넷플릭스와 협업한 사례는 드문 만큼 글로벌 단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레드독컬처하우스'의 행보에도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레드독컬처하우스'에서 '굿 헌팅'에 참여한 이대우 감독, 이호민 애니메이션디렉터, 김성민 아트디렉터와 배기용 슈퍼바이징 디렉터(대표)와 만나 '러브, 데스+로봇'이라는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소감, 그리고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블러 스튜디오의 러브콜로 '러브, 데스+로봇' 프로젝트 참여, 하청이 아닌 협업의 형태로 제작
배기용 대표는 '러브, 데스+로봇' 프로젝트는 블러 스튜디오가 먼저 '레드독컬처하우스'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준비 중이라는 제안에 '레드독컬처하우스'가 포트폴리오를 보내고 이를 블러 스튜디오가 긍정적으로 검토한 뒤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된 것. 배기용 대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우리의 포트폴리오에는 '굿 헌팅'과는 분위기가 다른 일본 아니메(애니메이션) 풍의 작품들이 많았는데, 블러 스튜디오가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긍정적인 답변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넷플릭스는 스튜디오에게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보장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레드독컬처하우스'도 넷플릭스와의 작업 과정이 일반적인 국내 회사와의 작업과는 달랐다고 밝혔다. 특히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 스튜디오에게 작업을 의뢰하는 것이 아닌 감독과 스튜디오 양측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었던 점이 인상깊었다고 했다. 이대우 감독은 “협업의 형태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처음 의견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정도 의견을 맞춘 후반부 작업에서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보장해줬다”라고 말했다.
양측이 함께 작품을 완성해 나가면서 '굿 헌팅'의 초기 아트 콘셉트와 완성된 작품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김성민 디렉터는 “우리의 생각을 블러 스튜디오에게 제시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작품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양측이 함께 작품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러브, 데스+로봇' 프로젝트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우리도 콘셉트를 설계하면서 흥미로웠다”라고 말했다. 이호민 디렉터는 “애니메이션 움직임의 경우 전체적인 동선 등 큰 움직임에 대해서는 가이드를 제공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고 협업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배기용 대표는 "무엇보다도 '굿 헌팅'의 디렉팅을 맡은 올리버 토마스 감독의 리드가 좋은 결과를 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라고 말했다.
'스팀펑크'와 '구미호'의 독특한 만남, 매력적인 비주얼 뒤에 숨은 고민들
'굿 헌팅'은 켄 리우 작가의 작품 '종이 동물원'의 단편인 '즐거운 사냥을 하길'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의 내용들을 팀 밀러 감독이 '러브, 데스+로봇'에 맞게 각색한 것이 '굿 헌팅'. '레드독컬처하우스'는 처음 '굿 헌팅'의 콘셉트를 전달받았을 때 부터 큰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동양적인 요소와 서양의 '스팀펑크'가 결합된 콘셉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법한 소재라는 것이 이대우 감독의 설명이다. 특히 팀 밀러와 데이빗 핀처가 감독으로 참여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부에서는 흥미로운 제안이었다고.
'굿 헌팅' 프로젝트에서 '레드독컬처하우스'의 가장 큰 과제는 전달받은 콘셉트를 실제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특히 블러 스튜디오 측의 전폭적인 지지와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해 2D 애니메이션으로 영상을 제작하고 부분적인 3D를 추가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대우 감독은 “2D와 3D 애니메이션의 제작 공정이 다르다 보니 양사의 의견을 조율하는데 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라며 “우리가 2D 전문 제작사인 만큼 블러 스튜디오가 우리에게 원하는 바도 확실했다”라고 말했다.
'레드독컬처하우스'의 고민을 통해 '굿 헌팅'은 중국 전통 건물이 등장하는 시대에서 '스팀펑크' 요소가 결합된 영국식민지배 하의 중국으로 시대가 변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특히 많은 시청자들이 생각하는 명장면은 구미호 '옌'이 '스팀펑크' 기술자 '량'의 도움을 받아 인간에서 구미호로 변신할 수 있는 '크롬 인간'이 되는 장면. 이호민 디렉터는 인간이 구미호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보는 사람들도 납득할 수 있는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밝혔다.
각 장면마다 확연하게 대비되는 색감도 매력적인데, 작품 전반의 색감을 담당한 김성민 디렉터는 작품에 어떤 색을 입힐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밝혔다. 작품에 어울리는 색감을 위해 '레드독컬처하우스'는 '컬러 스크립트'를 만들고 각 장면 속에 담긴 드라마적인 요소들을 색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 초반 장면에서는 하얀색을 전면에 내세우고 극적인 장면에서는 붉은 계열의 색을 사용했다고 하니, '굿 헌팅'을 보면서 색감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
김성민 디렉터는 “각 장면에 어울리는 색을 설정하고 색을 점차 조정하면서 어울리는 색감을 찾았다”며 “팀 밀러 감독은 이 작품이 성인용 애니메이션이고 주제도 강렬한 만큼 무게감이 있는 톤으로 분위기를 조성할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작품의 소재와 주제가 독특하다 보니 '러브, 데스+로봇'이 처음 공개될 당시 글로벌 단위의 호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굿 헌팅'에 참여한 '레드독컬처하우스' 역시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실감했다고. 배기용 대표는 “작품이 워낙 독특하다 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반응과 평가를 받았다”라며 “어른들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수요를 실감했다. '굿 헌팅' 이후 좋은 프로젝트에 대한 의뢰도 많이 들어오고 있으며 넷플릭스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되었다. 우리에게 든든한 포트폴리오가 생긴 셈”이라고 말했다.
이호민 디렉터는 상업성보다는 작품성에 집중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 인상깊었다고 밝혔다. 그는 “그림과 관련된 커뮤니티에서 국내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은 상업 예술에 가깝다 보니 예술적인 측면이 대두되지 않는다”라며 “'러브, 데스+로봇'을 통해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했다. 아티스트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작품에 참여했다는 것이 가장 인상깊은 경험이다”라고 말했다. 김성민 디렉터 역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유행처럼 '굿 헌팅'에 대해 이야기하는 현상이 좋았다고 밝혔다. 다음 작품을 위해 한층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플랫폼 다변화로 단편 애니메이션 시장 길 열려, 해외에 더 많은 기회 있다
'러브, 데스+로봇' 프로젝트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작품의 수위와 참신한 소재였다. 국내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대부분이 어린이 등 저연령층을 타깃으로 하는 것과 달리, 보다 선정적인 묘사나 심오한 소재를 통해 본격 '성인 애니메이션'을 지향하는 작품은 드물기에 '굿 헌팅'을 비롯한 '러브, 데스+로봇' 프로젝트가 호평을 받을 수 있던 것. 배기용 대표는 국내에서도 보다 다양한 소재를 다룬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배기용 대표는 “해외에서는 성인 애니메이션이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성인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선정적인 콘텐츠가 아니라 성인들이 즐길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라며 “과거에는 애니메이션의 타깃 연령층이 낮았지만 이제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다양한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성인들이 흥미를 가질 법한 이야기도 등장하고 보다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들을 원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 애니메이션을 접할 수 있는 글로벌 단위의 플랫폼이 증가하면서 성인용 애니메이션 시장이 보다 활성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김성민 디렉터는 “고 퀄리티 PV를 보면서 국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지만, 시장의 크기가 작은 국내에서는 아직 어렵다”라며 “그러나 글로벌 단위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러브, 데스+로봇'처럼 좋은 결과물이 더 나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대우 감독은 짧은 영상이 강세를 보이는 시장 상황 역시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 있어 청신호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 시간 정도의 장편 애니메이션은 제작하는데 비용도 많이 들고 시장의 수요도 적지만, 유튜브 등 영상 플랫폼이 다변화되고 클립 형태의 짧은 영상들이 각광받으면서 단편 애니메이션이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 김성민 디렉터 역시 국내의 실력 있는 스튜디오들이 많은 만큼, 이들이 함께 뛰어놀 수 있는 글로벌 단위의 프로젝트가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레드독컬처하우스'는 이런 글로벌 시장의 변화가 국내에도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보다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답했다.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 대부분이 저연령층을 타깃으로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수적인 만큼, 국내에서도 성인을 타깃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특히 아직 국내 시장에서는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수익을 내는 것이 어렵다는 점도 아직 국내 시장의 변화를 확신할 수 없는 이유다.
김성민 디렉터는 “단순히 '러브. 데스+로봇'처럼 여러 스튜디오가 힘을 합쳐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기반으로 다음 작품에도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라며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는 만큼 국내에서 벗어나 해외 시장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젊은 인력 부족한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 젊은 스튜디오 꿈꾸는 '레드독컬처하우스'
한편, 애니메이션 시장이 활성화된 일본에서도 투자 자본에 비해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배기용 대표는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답했다. 그는 “애니메이션 산업이 소강상태에 접어든지 20여년이 지났다”라며 “과거에는 촉망받는 산업이었지만 침체기를 겪으면서 빠져나간 인력이 보강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대부분이 40대에서 50대 사이의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중간 단계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인력이 부족한 것이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의 현주소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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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레드독컬처하우스'는 젊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지향하고 있다. 배기용 대표는 “우리는 평균 연령이 30세 정도로 다른 스튜디오에 비해 젊은 피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라며 “최근 다양한 플랫폼의 등장으로 인해 애니메이션 업계가 제 2의 호황기를 앞둔 가운데, 우리는 보다 젊은 피를 수혈해 내실을 다지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최근 게임이나 일러스트 등 아티스트들이 활약할 수 있는 직종이 증가하면서 2D 애니메이션 시장에 인력이 부족해지는 가운데, 젊은 인력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차별화 요소를 지닌 스튜디오가 되는 것이 '레드독컬처하우스'가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러브, 데스+로봇' 프로젝트에서 '굿 헌팅'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 이름을 알린 '레드독컬처하우스'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이대우 감독은 “이번 프로젝트는 그림 그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경험”이라며 “이런 작품에 다시 한번 참여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호민 디렉터 역시 “'러브, 데스+로봇' 프로젝트는 생각이 바뀌는 전환점”이라며 “이번에 겪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더 좋은 결과물을 내고 싶다”라고 말했다. 김성민 디렉터는 “고생한 모든 팀원들에게 고맙다. 이 친구들도 앞으로도 더 좋은 작품을 하고 싶다. 즐기며 일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다”라고 말했다.
배기용 대표는 '레드독컬처하우스'가 유능한 인력이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회사로 가꿔 나가고 싶다고 답했다. 단편 애니메이션 하나에도 평균 4만 매 정도의 그림이 들어갈 정도로 고된 작업이지만, 이들이 보람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도록 더 좋은 프로젝트와 환경을 조성하고 싶다는 것. 그는 “유능한 감독, 스탭들과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들,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잘 뽑아낼 수 있는 회사가 되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레드독컬처하우스'는 최근 자체 웹툰이나 웹소설을 통해 팬덤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업을 구상 중이다. 성인용 애니메이션의 불모지 한국에서 '러브, 데스+로봇'이라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레드독컬처하우스'의 향후 행보가 더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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