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은 한국인에게 의미깊은 날이지만, 일본인에게도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은 당시를 살아가던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필연적으로 삶의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식민지 관계가 종식되면서 모든 질서는 뒤바뀌었고, 역사적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CMB 박물관 사건목록'에서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이 무너졌을때의 기득권층의 심리를 '세상의 끝'이라 말한 것처럼,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8월 15일 이후는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인들, 그리고 국사교육을 받는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일제강점기 시절에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단순한 침략자이자 타지에서 온 지배자로 인지하지만, 한반도에서 살던 많은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습니다.
1910년 이전부터 한반도에 넘어와 반세기가 넘도록 한반도에서 살고있는 일본인도 있었고, 일제강점기 중기와 후기에 한반도로 넘어온 사람들이나 한반도에서 태어난 식민자 2세들은 조선인들의 저항도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일본 본토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살아가던 대략 100만 명의 일본인들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카무라가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로 돌아가야만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른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녀도 결국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집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왜 '자신의 고향'인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p.32
한반도의 일본인 중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지도층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리스 사태에서 보듯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은행의 돈을 인출하고자 했고, 일본정부는 금융이 정지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사람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는 한편, 화폐를 마구 찍었습니다. 이런 자기방어적 화폐는 향후 남한 사회에 심각한 경제 교란을 초래했으며, 그중 상당한 금액이 점령군을 상대로 한 접대비 명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한반도에 살던 모든 일본인들이 순식간에 일본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한반도의 일본인들을 본토로 수송하기 위해선 반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재산 반출에 대한 점령군의 제한 조치가 민간인은 1,000엔, 직업군인은 200~500엔으로 정해지면서 패전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살고 싶다는 일본인도 많았습니다.
잔류파들은 일본 본토로 넘어가도 아는 사람은 없고, 직장도 없고,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힘겨운 삶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패전 이후 경성일본인세화회와 경성YMCA가 재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자 수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며 한반도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모두 본토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세력이 닿은 남한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은 그나마 행운아였습니다. 일본인 상류층 인사와 미군 사이의 교류는 활발했으며, 조선인과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일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정도 재산을 숨겨 밀반출할수도 있었고, 많은 조선인들이 광복 이후 해외에서 돌아오면서 주택난 등의 문제가 불거지자 조선인과 일본인들은 비상국면에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면서 격변의 시대를 버텼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세력이 닿은 만주, 북한 지역에서 살던 일본인들은 달랐습니다. 패전 후 북한, 만주, 다롄 등 소련 점령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귀환 과정을 '지옥으로부터 탈출'로 묘사할 정도였습니다. 소련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받은 피해를 복구할 목적으로 한반도에 있는 설비, 기계등을 소련으로 가져갔고, 일본인 노동력을 탐내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갔습니다. 성폭력, 약탈 등 소련군의 악행은, 조선인 보안대원이 보다못해 일본인 여성을 산속이나 민가로 몰래 피난시켜줄 정도였습니다.
해외 거주자들은 종전 후 중앙정부로부터 어떠한 외교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거주지 선택권도 인정받지 못했고 재산마저 상실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돌아가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들의 재외 재산을 대외 배상 차원에서 국가가 처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71
8월 15일의 역사적 혼란은 한반도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산업 시설의 파괴와 물자의 폐기, 횡령과 밀반출 같은 일본인들의 불법행위로 한국의 재산은 더 줄어들었고, 일본인들의 재산이 갑자기 시장에 몰리면서 일본인 주택을 중심으로 시작된 투기 붐과 같은 갑작스런 물가의 폭등, 식량의 부족이 일어났습니다.
각종 공, 사유재산은 극소수의 한국인에게 집중되면서 왜곡된 부의 이동, 분배를 가져왔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겐 오히려 식민지 시절만도 못한 삶을 가져왔습니다. 한반도에서 살던 일본인들 역시 고통스러운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힘겹게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일본 동포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차별이었습니다. 본토인 입장에서는 외지에서 돌아오는 일본인들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귀환자, 제대군인들은 전후 일본의 열등 국민으로 전락했고, 빈곤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이 남긴, 태평양전쟁이 남긴 결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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