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 11 테러의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남아 있던 뉴욕, 2008년에 터진 금융 위기가 시민들을 옥죄고 있던 상황에서 '허드슨 강의 기적'은 뉴욕 시민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따뜻한 소식이었다. 설리(전투기 조종사 때부터 사용했던 호출명)는 일약 스타, 아니 '영웅'이 된다. 언론은 긴박한 순간에서 기지를 발휘해 탑승객 전원을 생존시킨 설리를 대서특필하며, 그를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다. 한편, 국가운수안전위원회는 회항이 아니라 허드슨 강에 비상 착수한 설리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는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은 양 극단의 반응 사이에서 사고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한 영웅의 심리를 쫓아간다. 탑승자 전원이 생존한 건 천만다행이지만, 회항을 선택하지 않고 강에 비상 착수를 한 건 '오판'이 아니었을까. 훨씬 더 높은 확률의 안전이 보장됐음에도 오히려 위험을 자초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사관들은 설리를 점차 조여오기 시작한다. 그 역시 '피해자'였음에도 설리는 '책임자'라는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참으로 고독한 위치가 아닐 수 없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혼란에 빠지지 않으며,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인물은 정말 뛰어난 위인이다. 영화에서 설리의 행동을 보는 것 자체로 정말 흥미로운 일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도덕적 딜레마를 맞닥뜨린 한 개인(영웅)의 고독한 싸움. '영웅주의'에 천착해 왔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는 소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당사자의 '내면'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회의 비정함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고뇌를 풀어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거장답게 뻔한 영웅 스토리를 뒤집어 씌우기보다, '영웅'과 '죄인'이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그려내며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골수 공화당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허드슨 강의 기적'을 영화로 만들고자 했던 이유의 기저에는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움에는 바로 '보수(保守)'라는 가치에 대한 긍지가 담겨 있다. 보수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과 신체, 그리고 재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지키고 유지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시스템은 제대로 유지되고 있고, 언제든지 당신을 위해 작동할 것이다. 안심해도 좋다. 지금의 이 사회는 단단하고, 안전하다. 걱정 마라.
1549편 여객기가 허드슨 강에 비상 착수한 지 4분이 채 지나지 않아 첫 번째 구조선이 도착했다. 곧 이어 뉴욕시의 구조대원과 해안경비대가 도착했다. 1,200명의 구조대는 일사분란하게 탑승객을 전원 구조한다. 불과 24분 만에 이뤄진 일이다. 더 놀라운 건, 마지막까지 비행기에 남아 "아직 누구 있습니까?"라고 외치며 승객들이 모두 빠져나갔는지 확인하는 기장의 모습이다. 그는 탑승객 전체 숫자인 '155'를 강조한다. 마침내 155명이 전원 생존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는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감독의 의도대로 '안도감'과 '감동'을 느꼈을 테지만, 우리의 입장은 좀 다르다. 착잡하고 씁쓸하기 짝이 없다. 우리에겐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시스템은 제대로 구동하고 있는가. '보수'가 주는 안전함이 피부로 느껴지는가. 안타깝게도 '불안'과 '공포'만 커진 세월이었다. 그 누구도 '국가'를 믿지 못한다. '시스템'을 신뢰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인가.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트라우마는 아직도 채 가시지 않았다. 우리에겐 '설리'가 없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구조에 임하는 승무원도 없었다. 자신만 탈출하기 바빴던 이기적인 선장과 승무원들만 있었다. 긴박한 순간에서 해경의 구조는 부실했고, 관료들은 무능함을 뽐내기 바빴다. 또, 정부는 총체적으로 무책임했다. 매뉴얼은 없었고, 그나마 있던 상식들도 지켜지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얼마 전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4의 강진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 사건 이후 신설된 국민안전처는 컨트롤 타워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주무부처인 기상청도 마찬가지였다. 기상청의 대응 메뉴얼에 '야간 지진 발생 시 밤에는 장관을 깨우지 말아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는 게 믿겨지는가. 아무런 준비도, 대응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국민들은 또 다시 재난의 인질이 돼 불안에 떨어야 했다. 세월호 사건을 겪은 후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은 달라진 게 없었다.
설리는 NTSB(National Transportation Safety Board·미연방교통안전위원회)의 청문회에 소환되고, 그 자리에서 의원들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해 각종 의혹들을 제기하고 검증한다. 물론 설리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에 편에 서게 된 관객들에겐 야속한 장면이지만, 오히려 그 장면은 큰 위안을 줬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의혹이 남지 않도록 깨끗이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은 '개인'과 '시스템'이 공존하는 사회의 안전함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시민들은 안심하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터널'에 머물러 있다.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인은 '오늘'을 살아갈 수 없다. 시스템을 신뢰하지 못하는 개인은 부서질 수밖에 없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를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마음이 먹먹했던 건, 시스템의 부재 속에서 꽃다운 삶을 마감해야 했던 아이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는 또 한번의 자각 때문이었다.
글 제공 :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의 블로그(http://wanderingpoet.tistory.com)
* 본문의 내용은 게임포커스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
| |
| |
| |
|
관련뉴스 |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