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중국 하얼빈 역에서는 일곱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가 하얼빈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 '페치카' 최재형 선생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라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식 벽난로를 가리키는 '페치카'라는 이름답게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에 정착한 한인들을 지원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의병활동을 지원하기도 한 독립운동의 심장같은 인물이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과거 최재형 선생의 생가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사격 연습을 했으며, 의거에 사용된 총기 역시 최재형 선생이 조달하는 등 그는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역사책 속에서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은 편.
역사가 기억하지 못한 '페치카' 최재형 선생의 이야기를 국내 인디게임 개발팀 '자라나는 씨앗'이 게임으로 만든다. '지킬 앤 하이드', '오페라의 유령' 등 고전소설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 어드벤처 게임들을 전문적으로 개발한 자라나는 씨앗이 7월 중 신작 게임 'MazM: 페치카'를 정식 출시한다. 게임은 1920년대 러시아 연해주를 배경으로 '페치카' 최재형 선생과 당대를 살아가는 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정식 출시를 앞두고 'MazM: 페치카'가 네오위즈의 온라인 인디게임 쇼케이스 '방구석 인디 게임쇼(BIGS: Banggusuk Indie Game Show) 2020(이하 비익스 2020)'를 통해 소개되었다. 유려한 인디게임 기대작들 속에서 스토리 기반 게임이라는 다소 투박한 승부수를 띄웠지만 연해주 독립운동사라는 독특한 소재 덕분에 게이머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자라나는 씨앗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역사 기반의 오리지널 스토리라는 점에서도 기존 'MazM' 프로젝트의 팬들의 기대감도 높은 편.
게임포커스가 'MazM: 페치카'의 정식 출시를 앞두고 마지막 담금질에 들어간 자라나는 씨앗의 김효택 대표와 만났다. 처음으로 역사 기반의 오리지널 스토리 게임을 개발한 소감에 대해 김 대표는 "처음으로 도전하는 영역인 만큼, 게임을 개발하면서 내부에서도 많이 고생했다"라며 "역사 속 영웅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당시의 상황을 조명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처음으로 선보이는 역사 기반의 오리지널 스토리, 역사 속 한 구절에서 영감 얻었다
자라나는 씨앗은 대형 게임사에서 경력을 쌓아온 김효택 대표를 주축으로 2013년 설립된 인디게임 개발사다. 설립 초기에는 교육적인 게임을 목표로 수학 학습 게임 등을 개발했지만, 2015년 고전 소설을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 'MazM(맺음)'을 기획하고 '오페라의 유령', '지킬 앤 하이드' 등을 소재로 한 게임들을 선보여 게이머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특히 7월 중 출시를 앞둔 'MazM: 페치카'는 자라나는 씨앗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역사 소재 게임이자 오리지널 스토리를 다룬 게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게임은 1908년에서 1920년대 일제강점기 초기, 러시아 연해주를 배경으로 한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상을 다루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가상의 인물들을 내세우고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사회분위기와 '페치카'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배경,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가 이미 정해져 있는 고전 소설과 달리,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역사물은 게임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도전인 셈이다. 김효택 대표 역시 과거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아직 역사 기반 스토리를 만들기에는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라는 의견을 전한 바 있다.
김효택 대표는 내부의 계획보다는 좀더 빨리 역사 기반의 게임을 선보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및 3.1운동 100주년이었는데, 당시 독립운동사를 소재로 하는 게임을 기획 중이라는 후배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역사 소재의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게임에서 다룰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찾기 위해 다양한 역사 자료들을 찾던 중 김효택 대표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페치카' 최재형 선생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고 안중근 의사의 실질적 배후 역할까지 하는 등 독립운동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그이지만, 역사책 속에서는 "페치카 최재형 선생이 안중근 의사를 도왔다"라는 구절을 제외하면 그다지 구체적인 이야기가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
김효택 대표는 "페치카 최재형 선생이라는 인물을 자료를 조사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라며 "역사 속 한 구절에서 그의 존재를 알고 더욱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면서 그의 삶이 굉장히 드라마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게임을 통해 최재형 선생이라는 인물을 조명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페치카' 최재형 선생의 이야기와 독립운동사의 빈칸, 가상의 인물들로 완성하다
'페치카' 최재형 선생을 소재로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워낙 역사 속에서 기록된 그의 생애가 적다 보니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최재형 선생의 출생, 연해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게 된 대목은 찾을 수 있지만, 그 사이의 성장 과정이나 소소한 이야기들이 부족한 것.
특정 사실에 기반해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대체 역사물'을 만든다면 일이 보다 수월하지만, 김효택 대표는 판타지가 아닌 당시의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김 대표는 "처음부터 대체 역사물을 만들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라며 "안중근 의사가 만약 저격에 실패했다면 어땠을까 같은 대체 역사도 재미있겠지만,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고뇌와 생활상을 게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게 좀더 의미가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에 김효택 대표가 선택한 해결책은 가상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 나가고 여기에 '페치카'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연결시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오리지널 스토리를 선보이는 것이다. 게임의 이름은 '페치카'이고 게임 내에서도 '페치카' 최재형 선생이 등장하지만, 실질적인 게임의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인 '표트르 벨로프'를 비롯해 당시 연해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다. 역사적인 배경을 기반으로 가상의 인물들의 오리지널 스토리를 보여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과 비슷한 느낌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것으로 기대된다.
가상의 인물들로 역사의 빈칸들을 완성하기로 결정했지만,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여전히 순탄치 않았다는 것이 김효택 대표의 소감이다. 남자 주인공 2명, 여자 주인공 2명이라는 스토리의 방향성은 정했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게임을 개발하면서 수도 없이 바뀌었다는 것. 게임의 플롯을 완전히 뒤엎는 작업을 8번 정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지금의 'MazM: 페치카'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1910년대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나 당시의 생활상을 다룬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 역시 게임을 개발하면서 힘들었던 부분이다. 이에 역사책 속 자료 뿐만 아니라 박환, 윤상원, 반병률 교수 등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한 논문 56편 분량을 전부 찬찬히 뜯어 살피며 당시 러시아, 일본의 분위기와 생활상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게임 속에서 구현된 연해주는 낯선 땅, 미지의 세계 같은 느낌을 주도록 디자인되었다. 김효택 대표는 "연해주는 한국 사람 뿐만 아니라 유럽 사람,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낯선 곳이다"라며 "동쪽 가장 끝, 낯선 땅에 위치한 미지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을 전할 예정이니 배경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김효택 대표는 "역사를 소재로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라며 "내부에서도 워낙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 다음 게임은 역사 대신 다시 고전소설을 다룰 것 같다. 잠시 회복기를 가진 뒤에는 다시 다른 역사 기반 스토리 게임을 선보이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역사물에서 영웅만 다룰 필요는 없어, 발전한 스토리라인과 연출 보여드릴 것
한편, 국내에서 역사를 다룬 게임은 유독 드물다. 일본에서는 심심하면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들이 등장하거나 중국의 역사물 '삼국지'는 여러 차례 게임으로 재해석된 바 있다. 최근에는 '어쌔신크리드' 시리즈가 세계 각국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지만,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한 게임이 드문 것이 현실.
김효택 대표는 이에 대해 '영웅'만을 조명하고자 하는 소위 '영웅주의적'인 관점이 이유라는 견해를 전했다. 국내에서 역사를 다룰 때에는 흔히 영웅의 웅장한 싸움이나 거대한 승리 등을 조명하는데, 영웅 이외에도 당시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을 조명하면 다양한 소재들을 발굴할 수 있다는 것.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역사다. 역사를 재미없다고 느끼는 것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역사라는 것이 꼭 대단한 일을 그릴 필요는 없다. 명량해전을 다루면서도 이순신 장군 뿐만 아니라 전란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이나 전쟁을 대하는 일본의 관점을 조명할 수 있다. 그걸 픽션으로 그리면 소설이 되고 사실로 그려내면 역사가 되는 것이다" 김효택 대표의 이야기다.
역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연해주의 생활상과 독립운동사, '페치카' 최재형 선생을 발굴하는 등 'MazM: 페치카'는 좋은 의도를 담고 있지만 결국 게임은 '재미'로 평가된다. 특히 스토리 기반 게임은 단조로워지기 쉬워 'MazM: 페치카'가 자칫 지루한 역사 교육물이 될 것이라는 걱정이 들기도 하는데…
김효택 대표는 'MazM: 페치카'가 단순히 좋은 의도를 담은 것 뿐만 아니라 스토리 기반 게임으로도 발전한 결과물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전했다. 김 대표는 "스토리텔링도 자꾸 하다 보니 늘더라. 이번 작품에서는 전작에 비해 좀더 진지하고 깊은 영역을 다룬다. 기술적인 재미 못지 않게 몰입감 높은 스토리를 전하고 영화를 본 것 같은 쾌감을 느낄 것이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연출도 전작에 비해 강화된다. 쿼터 뷰 시점을 채택했던 전작과 달리 2D 횡스크롤 시점으로 게임을 기획한 것 역시 연출 때문. 쿼터 뷰 시점으로 게임을 진행하면 보기에 편하고 만들기도 편하지만 얼굴이나 전체적인 분위기, 배경 등을 함께 보여줄 수 없어 감정 전달이 부족하다는 것. 이에 캐릭터의 초상화보다는 게임 내 캐릭터의 그래픽을 주로 활용하고 근접 촬영 구도를 빈번하게 사용해 드라마틱한 연출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게임은 당초 6월 중순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7월로 출시일이 연기된 것 역시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결정이었다. 김효택 대표는 "좀더 나은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고 정식 출시 이전 문제들을 추가로 발견하면서 발매일이 조금 연기되었다"라며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기도 한데, 항상 게임을 제 시간에 맞춰 낸 적이 없다. 내부적으로도 많은 도전을 한 작품인 만큼 두렵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스토리텔링을 강화한 만큼, 수익모델에서도 조금 다른 도전을 선보인다. 게임 발매 이후 모든 이야기를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매주 한편씩, 총 23주에 걸쳐 'MazM: 페치카'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 일정대로라면 게임의 정식 출시 이후 12월 경에는 완결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 예정이다. 게임에서는 드물게 구독형 수익모델을 채택하기에 'MazM: 페치카'의 도전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김효택 대표는 "MazM: 페치카에서는 총 23주 동안 매주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일 예정이다"라며 "웹툰이나 웹소설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식을 게임에서 선보이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매주 꾸준히 연재하다 보면 12월 정도에는 게임의 결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창작' 본연에 집중한 것이 '인디' 정신, '비익스2020'은 좋은 기회다
자라나는 씨앗은 게임의 정식 출시를 앞두고 네오위즈가 주최한 온라인 인디게임 쇼케이스 '방구석 인디 게임쇼 2020'에 'MazM: 페치카'를 출품했다. 다수의 인디게임 공모전에서 수상하고 여러 차례 신작들을 출시하는 등 입지를 다져온 자라나는 씨앗이기에 이제 자라나는 씨앗을 인디게임 개발사로 볼 수 있냐는 의견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효택 대표는 "대부분의 인디게임 개발팀이 그렇듯 우리도 지원금을 받으면서 버티고 다음 기회를 모색하는 회사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또한 그는 "출판사가 책을 50권 이상을 내면 자리를 잡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디게임 개발사 역시 5편에서 10편 정도 게임을 낸 뒤에는 자리를 잡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나. 트렌드를 쫓으면서도 우리의 이름과 정체성을 각인시킬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게임을 개발하고 출시하는 장벽이 낮아지면서 최근에는 다양한 형태의 중소규모 게임 개발팀이 등장하고 있다. 개중에는 대형 게임사로부터 투자를 받는 등 '독립'을 의미하는 '인디게임'의 정의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들도 나오는 상황.
김효택 대표는 '인디게임'의 정의에 대해 '창작'이라는 게임 개발의 목표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전했다. 그는 "게임 시장이 점차 커지면서 게임을 만드는 창작보다는 이에 따라오는 수익에 목적을 두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라며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그렇듯 게임 역시 창작물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시장 자체에 상업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창작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창작을 목표로 나만의 길을 걷는 것이 '인디'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방구석 인디 게임쇼'같은 기회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김효택 대표는 "구글플레이에서 진행한 인디게임 페스티벌 수상 소감으로 대형 게임사들이 인디게임 생태계 조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라며 "네오위즈는 국내 대형 게임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디게임사의 생태계에 관심을 두는 곳 같다. 당장의 수익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게임사들도 인디게임 개발사들을 위한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자라나는 씨앗은 'MazM: 페치카'를 정식 출시한 뒤 다음 작품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이미 'MazM' 프로젝트의 팬 커뮤니티를 통해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등 세가지 작품을 후보로 올린 상황. 이중 '프랑켄슈타인'이 차기작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MazM: 페치카'처럼 계획에 없던 신작을 선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 김효택 대표의 이야기다.
김효택 대표는 꾸준히 자라나는 씨앗의 게임을 즐겨주는 팬에 대한 감사의 이야기도 전했다. 김 대표는 "다양한 스토리 게임 중 우리의 MazM 프로젝트를 꾸준히 즐겨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라며 "더 좋은 게임으로 다가가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다. 잊지 않고 응원을 보내주시는 팬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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