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12년 전, 그가 첫 메이저 장편 애니메이션 '별을 쫓는 아이' 국내 개봉에 맞춰 내한했을 때였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언어의 정원'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그와 꽤 길게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남아있다.
"빌딩들로 가득 찬 거리를 그리는 것보다 하늘을 그리는 것이 편하다. 시간과 노력이 더 적게 들기 때문이다. 적은 수고로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고, 하늘을 싫어하는 사람은 잘 없더라"라고, 하늘을 자주 묘사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은 엉뚱한 답을 하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국내에 열광적인 팬들이 소수 존재했지만, 유명하고 흥행이 보장되는 그런 감독은 아니었다.
그러던 그가 '너의 이름은.'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한국 관객 300만명 시대를 열더니, 올해 개봉한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은 5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소위 '대박'을 냈다.
'스즈메의 문단속' 개봉 직전 수입, 배급사 미디어캐슬 강상욱 대표에게 '관객이 어느 정도 들 것 같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 강 대표는 "500만 관객이 들면 신카이 감독을 다시 불러 감사 인사를 시키려고 한다"고 했는데, 기자를 포함한 업계 관계자들 상당수는 그 말을 반 농담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너의 이름은.'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같이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 수백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500만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5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 5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 극장 상영이 마무리된 시점에서 강상욱 대표를 다시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500만 관객'은 절실해서 했던 말, 재난보다 사랑에 집중한 게 통했어
이혁진 기자: '스즈메의 문단속' 개봉 직전 500만 관객 이야기를 하신 게 생각납니다. 실제 500만 관객이 영화를 보고, 상영이 마무리된 시점에서 돌아본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당시 정말 500만 관객이 봐 줄거라는 자신이 있었던 것인가요
강상욱 대표: 자신감이 있었다기보다는 절실했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절실해서 할 수 있는 모든 홍보, 마케팅을 했고요.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스즈메의 문단속' 작품이 워낙 좋았다는 것이죠.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일본 관객들과는 다를 것이다, 대지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생각했을 때, 일본에는 국민적 PTSD로 다가가는 부분이지만 한국에서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볼 것이라고 예상했고요.
그래서 그런 어떤 강력한 정신적 충격에 집중하기보다는 스즈메라는 아이가 어떤 삶을 겪었고 어떤 모험을 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과 만나는가 같은, 보다 관조적인 자세, 영화 자체에 집중해서 볼 것이라고 봤습니다.
한국 관객들은 신카이 감독이 의도한 그런 엔터테인먼트 측면에서 영화를 더 볼 것이라는 생각에 그 부분에 치중해서, 마케팅 면에서 지진, 재앙과 같은 언급은 피하고 스즈메의 모험, 소타와의 러브스토리 부분에 집중하려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밝히자면 사실 신카이 감독은 두 사람의 감정은 '러브'보다는 '전우애' 아닌가 하던데, 팬들이 바라는 것은 전우애가 아니라 '러브' 아니겠어요?
그래서 한국판 예고편 등에서 한국 관객들이 이런 시각으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아 스즈메와 소타의 미묘한 감정, 애정어린 관계 같은 것을 좀 더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한국 팬들이 원하는 신카이 감독의 감성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죠.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이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했고, 한국에서 다행히 관객들이 사랑해 주신 것 같습니다. 신카이 감독도 적극적으로 프로모션에 협조해 주셔서 두번이나 한국을 찾았는데, 두번 방문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그런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해서 비수기임에도 많은 분들이 봐주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니 전우라뇨... 한국에서의 그런 마케팅 방향성에 대해 신카이 감독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강상욱 대표: 연인 느낌이 제대로 나도록 한 것인데, 거기 대해 반대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좋다고, 다른 나라에서도 이 예고편을 사용해야겠다고 저희가 만든 것을 가져가 사용하더군요.
역시 신카이 감독 하면 '보이 미트 걸'이잖아요? 그런 포인트가 잘 먹힌 것 같습니다.
일본 애니 수입 경쟁 과열, 좋은 작품 찾으며 시리즈 확보에도 공들일 것
'슬램덩크'에 이어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빅 히트를 기록하며 근래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 경쟁이 치열하다고 들었습니다
강상욱 대표: 확실히 수입 시장의 규모가 커져 있습니다. '슬램덩크'가 크게 성공하고 '스즈메'도 이렇게 잘 되다 되니 국내 관객들에게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니즈가 분명히 있다는 판단이 업계에 생겨난 느낌입니다.
말씀대로 경쟁이 치열하고 더 격화되겠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과연 맞는 방향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업을 하는 입장이라 승부수가 된다고 하면 과감히 투자도 하고 승부에 나서야 하지만, 끝없이 오르는 수입가를 쫓아가는 것이 맞는지에 회의감도 있습니다. 오리지널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파괴적인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유일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대형 TV시리즈의 극장판에 관객이 몰리는 느낌도 있는데, 저희는 그런 작품들을 끝까지 따라간다는 전략도 아닙니다. 저희의 정체성은 영화사니까 실사영화도 계속 신경써야 하고, 애니메이션 극장판의 경우 그 동안 시리즈를 가져오지 않다가 갑자기 특정 작품의 신작 영화만 가져오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고요. 계속해서 좋은 작품은 찾고 있고, 시리즈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시리즈 라인업도 강화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최근 일본 실사영화 화제작을 몇편 가져오셨던데, 부산영화제에서 공개하셨죠
강상욱 대표: 이와이 슌지 감독의 '키리에의 노래'와 거장 고레에다 감독의 신작 '괴물', 거기에 이시이 유야 감독의 '달', 사카모토 류이치 다큐멘터리까지 네 작품을 가져갔습니다. 네 작품 모두 오픈하자마자 매진되었더군요. 이와이 슌지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시이 유야 감독 모두 팬덤이 확실해서 반응은 되게 좋았고 극장가에서 의미있는 성과를 낼 거라 봅니다.
개봉 일정도 정해졌나요
강상욱 대표: '키리에의 노래'는 11월 1일 개봉으로 확정됐습니다. '괴물'은 11월 29일로 생각중입니다. 두 작품이 연달아 개봉하지만 준비를 오래한 작품들로 촉박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키리에의 노래'는 이와이 감독님이 일본 개봉과 시간차가 많이 안 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으셨고요. '괴물'은 5개월 정도 텀이 생겼는데 죄송한 마음입니다. 고레에다 감독님이 부산영화제에 꼭 가야 한다는 입장이셔서 부산영화제 후로 개봉이 잡혔습니다.
'그리드맨 유니버스'와 '북극백화점의 컨시어지' 국내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
애니메이션 화제작 '그리드맨 유니버스'나 '북극백화점의 컨시어지'를 확보하셨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는데, 개봉 일정이 잡혔나요
강상욱 대표: '북극백화점의 컨시어지'는 2024년 1분기, 늦어도 상반기 중에 개봉할 계획이고 기대작입니다. 정말 잘 만든 애니메이션입니다. 이제까지 일본 애니메이션 중 한국에서 잘 된 것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작화가 있는 편인데, 기존 작화와 다른 독특한 작화에 설정도 독특합니다.
'스미코 구라시'도 3편을 개봉하려고 하는데 1, 2편도 겨울 중에 극장에서 보실 기회를 마련하려 합니다. 이 정도가 2024년 1분기까지의 애니메이션 라인업입니다.
'그리드맨 유니버스'는 '프로메어'에 대한 반응을 보고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서 들여오기로 했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2024년 5월 정도로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신카이 감독의 신작은 이제 2025~6년에나 만나볼 수 있겠죠
강상욱 대표: 신카이 감독의 차기작이 나오기 전까지는 재미있고 탄탄한 작품 위주로 라인업을 잘 꾸려 가야겠습니다. 이번에 500만 관객을 동원했으니 차기작은 천만 관객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그런데 '날씨의 아이' 빼고 '너의 이름은.'과 '스즈메의 문단속'은 제가 말한 대로 정말 됐잖아요? 기대해 봐야겠습니다.
차기작은 재난 3부작 이후 첫 작품이라 기대가 됩니다
강상욱 대표: 저도 신카이 감독의 다음 행보가 어떨지 궁금합니다. 재난 3부작을 끝내고 이제 재난 소재는 안 한다고 했으니 무엇을 보여줄지... 플롯이 나오면 보여준다고 하던데 제가 본다고 알아먹을지 모르겠네요.
마지막으로, 향후 국내 극장가에서의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전망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강상욱 대표: TV시리즈 파생 극장판을 중심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 경쟁이 더 심해질 것이라 봅니다. 저희도 뛰어들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가격 경쟁을 끝까지 쫓아갈 마음은 없고 좀 더 합리적인 가격의 좋은 작품 발굴에 중점을 두려 합니다. 저희가 VOD 유통도 시작했으니 애니메이션, 드라마 시리즈로 라인업을 확장할 생각이고요. 안정적인 매출을 가져가면서 다음 신카이 감독의 작품으로 좀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게 준비해 보려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강 대표가 '프로메어' 팬들에게 감사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프로메어'는 개봉 후 팬들의 요청으로 끊임없이 재상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 강상욱 대표는 "재상영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계속 극장을 찾아 영화를 봐 주시는 팬 여러분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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