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에서 구운몽까지, 한국 오토메게임은 어떤 길을 걸었나

'비주류' 한국 오토메게임의 역사

등록일 2014년05월15일 13시35분 트위터로 보내기


지난 3월 발매한 네온스튜디오의 '구운몽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이하 구운몽)는 불모지와 같던 한국 오토메 게임계에 봄비처럼 찾아온 반가운 작품이었다. 구운몽이 시발점이 되어 국내 게임 시장에도 오토메 게임이 화려하게 꽃 피울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유저들도 있다. 


비주류라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국내에 시장 확보가 안 되어 있는 오토메 게임. 넥슨이라는 국내 최대 게임사의 비주류인 오토메 게임 출시를 계기로 게임포커스는 국내 오토메 게임 시장의 역사와 국내 출시된 다른 오토메 게임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나 국내 오토메 게임 시장이 특히 작기도 하고 발매된 게임이 무척 적어 국내 오토메 게임의 내적인 변화나 발전 과정, 유행을 논하는 것 조차 어려웠다. 거창하게 역사를 논하기는 미흡한 규모지만 어렵사리 명맥을 이어온 만큼 한 작품 한 작품이 각각 의미를 갖는다고 여기며 한국 오토메 게임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오토메 게임의 정의부터 짚어보자. 오토메 게임은 여성향 게임 중 특히 남성 캐릭터들과의 연애가 중심인 게임이며 텍스트 어드벤쳐 장르에 속한다. 일본에서는 이 같은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을 '오토메 게임(乙女 ゲーム)'이라고 따로 지칭하고 1994년에 발매 된 일본 KOEI사의 '안젤리크'를 최초의 오토메 게임으로 보고 있다. 성인용 게임이 큰 지분을 차지한 남성향 연애시뮬레이션에 비해 오토메 게임은 전연령 대상의 게임이 대부분이다.

초창기 여성향 게임 속의 오토메 게임
우리나라의 경우, 남성 게이머를 타겟으로 한 가이낙스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프린세스메이커 시리즈'가 여성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 초창기 국내 여성향 게임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된다.

초창기에 출시된 여성향 게임 코코룩(나비야 엔터테인먼트)이나 딸기노트 시리즈(오픈마인드월드)는 이처럼 프린세스메이커 시리즈에 영향을 받은 게임이다. 하지만 게임의 주된 플레이는 육성이나 경영 시뮬레이션에 가까우며 남성 캐릭터와 결혼하는 엔딩이 있는 정도였다. 남성 캐릭터를 직접 만나 연애하는 게 중점이냐 아니냐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정체성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단순히 여성향 게임이지 오토메 게임으로 분류할 수 없다.

이와 달리 오픈마인드월드의 '러브 시리즈'는 본격적인 오토메 게임으로, 주인공이 공략하고 싶은 상대 남성 캐릭터에 맞춰 옷을 입는 것은 물론 직접 화장도 해야 한다. 실제로 게임 발매 당시 화장품이 포함된 한정 패키지가 출시되기도 했다.

화장품이 포함된 '러브2' 패키지


그러나 PC 패키지 게임 시장이 침체되고 온라인 게임이 강세를 보이며 자연스레 패키지 형태의 여성향 게임은 나오지 않았고, 기존 여성향 게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육성 및 꾸미기 요소는 다른 온라인 게임이나 플래시 게임으로 흡수되었다. 국내 남성향 연애 시뮬레이션은 모바일 게임으로 적지만 꾸준히 출시되었는데 이와 다르게 오토메 게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국내에 출시된 PC 오토메 게임은 일본 오토메 게임을 수입한 것이 많았다. 지금도 애니메이션, 성우 이벤트, 오디오 드라마 CD 등 각종 미디어믹스가 활발히 진행되는 일본의 오토메 게임을 주로 플레이하고 여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오토메 게임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는 것도 오토메 게임의 형식이나 이를 즐기는 문화 등이 일본에서 그대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예전만큼 패키지 게임 시장 자체가 활발하지 않아 국내에 정식 발매(한글화)가 된 게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토메 게임을 플레이 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한편, 기존 오토메 게임 유저들을 끌어오기보다 완전히 새로운 시장에서 새로운 세대의 여성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틈새 시장을 공략한 사례도 있다. 저연령층 여성 게이머를 대상으로 플래시 게임을 서비스하는 아툰즈는 자사 게임 서비스 사이트 '비비빅닷컴'에 플래시 웹 게임 기반의 오토메 게임을 선보였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된 '퓨어 로망 시리즈'를 기획한 아툰즈는 첫 번째 작품으로 연애 시뮬레이션에 액션 RPG를 더한 '보석소녀 엘레쥬'(2007), 뒤이어 '스타프로젝트 온라인'(2010), '러브 다이어리'(2011)를 출시했다.
 


3부작 중 가장 흥행한 스타프로젝트 온라인은, 플레이어가 매니저가 되어 연예인 지망생인 남성 캐릭터들을 톱스타로 키우는 내용의 육성시뮬레이션 요소가 있는 오토메 게임이다. 네이트와 네이버와 같은 대형 포털 사이트의 소셜 게임 서비스에 진출하며 더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 게이머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스타프로젝트 온라인은 국내 최초로 캐릭터 송(SONG) 음반이 나올 정도로 크게 인기를 끌었고 일본 및 유럽에도 서비스되었다. 

스타프로젝트온라인은 캐릭터 송 음반이 출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성우 콘서트도 열렸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동인 제작 게임
국내 여성 게이머를 대상으로 한 패키지 형태의 게임 및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에 여전히 수요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작품은 바로 팀 대인배들의 동인 제작 게임 '어이쿠! 왕자님~호감가는 모양새'(2007)였다. 어이쿠! 왕자님은 비록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오토메 게임'이 아니라 남성 주인공이 남성 캐릭터와 연애하는 'BL(boys love) 게임'이지만 이 같은 소규모 동인 게임이 화제를 일으키며 동인 제작 여성향 게임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다만 동인 제작 게임이라는 특성상 제작 과정의 어려움뿐 만 아니라 출시 과정 자체에도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다. 때문에 대부분 온라인 무료배포 형식을 취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서브컬처 행사인 '코믹월드'가 동인제작 게임의 주요 판매장소인데 코믹월드 운영원칙 상 상업 목적의 판매는 금지한다는 조항에 따라 특정 동인 게임 제작팀의 판매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에 더해 게임물등급위원회(현 게임물관리위원회)에서 심의 받지 않은 게임을 판매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단순히 취미 목적으로 만든 게임을 판매하는 데에도 사업자 등록이 반드시 필요한 것 등 단발성 프로젝트에 그칠 동인 게임을 제작하는 소규모 단위의 팀에게는 정식 심의를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원대한 포부로 거창하게 시작한 프로젝트도 있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 상 무산되어 발매일이 기약 없이 미뤄지는 등 실제 완성되어 출시되는 게임은 무척 적은 상황이다.

체리츠, 국내 유일의 여성향 게임 전문 제작사를 자처하다
2012년 여성향 게임, 특히 오토메 게임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게임 회사 체리츠가 나타났다. 체리츠는 첫 작품인 '덴더라이언'(2012) 그리고 '네임리스'(2013)를 차례로 출시했다.
 


네임리스는 오디오 드라마 CD 제작사 ACO, 구체관절 인형 회사 비제이디크로비의 크로비돌과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전작인 덴더라이언과 달리 풀보이스(Full voice) 수록 및 발매 전 웹 라디오를 배포, 오프라인 성우 이벤트를 열고 국내 성우 팬들의 관심을 모았을 뿐 만 아니라 게임 내 캐릭터를 인형으로 출시하는 등 오토메 게임에 관심이 적던 이들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했다.

일본 오토메 게임의 미디어믹스화를 벤치마킹한 듯 새로운 시도를 보였지만, 게임 발매 전 네임리스 프로젝트의 저작권 문제로 상업 작품답지 않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며 유저들의 신뢰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게임 자체의 완성도도 그리 높지 않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완성도 높은(혹은 이미 성공한) 일본 오토메 게임에 익숙한 국내 오토메 게임 유저들 입장에서 체리츠는 동인 제작 규모의 팀이 회사를 설립해 만드는 게임 정도의 퀄리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공략 캐릭터가 동물로 변하고 동물 귀를 달고 나오는 덴더라이언이나 공략 캐릭터가 인형이라는 설정인 네임리스 역시 판타지 요소가 강하고 게임 내 일본식 표현이 빈번하게 쓰이는 등일반적인 국내 정서와는 맞지 않아 '국산 오토메 게임'을 기대했던 유저들은 다소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오토메 게임계의 새로운 기대주, 네오앨리스
그리고 2014년 3월 국내 오토메 게임계에 한 획을 그을만한 게임 '구운몽'이 출시됐다.

네온스튜디오의 네오앨리스 팀이 제작한 구운몽은 김만중이 지은 동명의 고전소설에서 모티프를 따왔다는 점이 오토메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비록 양소유가 여성이고 팔선녀가 남성으로 바뀐 원작 구운몽과는 성반전된 양상을 보이지만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생소하지 않으니 익히 알고 있는 고전소설의 패러디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

또 구운몽을 제작한 네온스튜디오가 넥슨의 자회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더욱 주목을 받았다. 언제 공중분해 될지 모르는 동인 제작 팀이나 신생 회사도 아닌 안전성이 보장된 제작사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만큼 신뢰도도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구운몽은 온라인 게임을 주로 개발, 서비스 하는 넥슨이 PC 패키지 게임을 단독으로 개발하고 발매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국내 오토메 게임 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구운몽은 설정집이나 OST같은 여러 가지 구매 특전이 포함된 한정판 패키지를 비롯하여 온라인을 통한 다운로드 판매도 시행했는데, 게임 플레이 시 매번 서버에 계정 인증을 거쳐야 하므로 인터넷을 연결하지 않고는 게임 플레이가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구매한 게임을 완전히 소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만족감을 저하시키지만 고질적인 PC 패키지 게임의 불법 복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이기도 하다.
 


모바일 게임 시장이 오토메 게임의 주무대 될까
한편,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통해 일본의 모바일 오토메 게임을 즐기는 유저도 있으며, 이를 정식으로 수입, 서비스하는 경우도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앞서 언급한 아툰즈의 스타프로젝트 온라인은, 기존의 육성 게임 요소가 빠지고 캐릭터 별 시나리오만 따로 담긴 '어나더 데이트' 버전이 모바일 플랫폼으로 따로 출시되기도 했다. 또한 2013년 비주얼 노벨 '스파이뮤즈'를 모바일 플랫폼으로 선보였다.

동인 제작 오토메 게임에도 이에 관한 반가운 소식이 있다. 발매 직전 안타깝게 무산되었던 팀 네버랜드의 동인 제작 오토메 게임인 '웬디의 네버랜드'의 프롤로그 격인 '검을 든 소녀의 왕자님 EEC'가 5월 2일 모바일 버전으로 출시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동인 제작팀이 PC 패키지 게임으로 출시한 작품을 모바일로 이식하거나 모바일 플랫폼 전용 게임을 제작 중이다. 비교적 제약이 적은 오픈 마켓을 통해 게임을 출시할 수 있으며, 패키지 제작을 위한 기본 자금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동인 제작 팀의 입장에서 모바일 게임으로 출시할 때 얻는 장점이 크다.

PC 패키지 게임으로 선보였던 네온스튜디오의 구운몽 역시 이후 모바일 버전으로 이식될 예정이다. 네온스튜디오 역시 모바일 게임 전문 개발사지만 구운몽의 경우 PC 플랫폼 우선 제작을 고집하여 나온 결과다. PC 보다 모바일 쪽이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모바일 버전 출시를 간절히 기다리는 유저들도 많다.

구운몽이 국내 오토메 게임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 되었던 것처럼 앞으로 국내 오토메 게임의 저변 확대는 네온스튜디오와 네오앨리스 팀의 차기작 및 앞으로의 활동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온스튜디오의 구운몽이 대기업의 소수지향의 게임 및 패키지 게임 시장을 향한 단순한 실험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오토메 게임 계에 튼튼하게 뿌리 내릴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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