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온(Teyon)이라는 개발사가 있다. 약 20년 동안 PC와 콘솔게임을 만들어 온 폴란드 소재 개발사로 1인칭 슈팅게임과 퍼즐게임, 패밀리게임 등을 선보여 왔다.
'로봇 레스큐'로 테이온의 게임을 처음 접한 유저가 많을 텐데, 기자가 처음 플레이한 테이온의 게임은 '헤비파이어: 아프가니스탄'이었다.
'헤비파이어 아프가니스탄'은 고전적인 레일 슈팅 스타일로 개발된 게임으로, 레일 슈팅 장르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 2010년대에 제대로 만든 레일 슈팅게임이 나온 것이 반가워 트로피가 나뉘는 북미판과 일본판을 모두 구입해 플레이한 기억이 남아있다.
테이온은 그 뒤 '헤비파이어' 시리즈를 몇 작품 더 선보였고, PC와 콘솔에서 매년 복수의 게임을 출시하는, 다작하는 개발사가 됐지만 큰 규모의 게임을 만드는 회사는 아니었다.
테이온 게임을 꾸준히 구입해 플레이하며 '람보'나 '터미네이터'도 해 봤지만 썩 잘 만든 게임들은 아니었다. 영화 IP 게임화를 사업모델로 삼았다 정도로 결론짓고 2023년 '로보캅' 게임인 '로보캅: 로그시티'가 발매되었을 때에는 '람보나 터미네이터같은 게임이겠지'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갔다.
그리고 해를 넘겨 2024년 초 '테이온 게임을 10년 넘게 따라왔는데 그래도 플레이는 해 봐야겠다' 정도의 가벼운 생각으로 '로보캅: 로그시티'를 시작했다.
원작에 대한 리스펙트, 오리지널 요소도 잘 살렸어
결론부터 적자면, 테이온에서 '로보캅: 로그시티'를 개발한 개발진에게 사과하고 이런 멋진 게임을 만들어준 것에 감사를 전해야할 것 같다.
'로보캅: 로그시티'는 원작에 대한 리스펙트가 강하게 느껴지면서도 IP에 기반한 오리지널리티도 잘 살렸고, 1인칭 슈팅 디자인에 고전 RPG의 요소들을 결합한 멋진 게임이었다.
원작 '로보캅' 시리즈의 2편과 3편 사이의 어디쯤으로 보이는 가상의 시기를 배경으로 원작 영화 시리즈에 나왔던 캐릭터, 메카닉, 사건들을 적절히 재배치해 활용하고 있다. 황폐화된 디스토피아 세계인 미래의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로봇으로 경찰을 대체하려는 계획과 신도시를 건설하며 빈민들을 배제하려는 음모, 정치적 암투, 영생을 추구하는 권력자의 음모가 교차한다.
플레이어는 로보캅이 되어 범죄를 막고, 사건 사고를 해결하는 한편 등장하는 NPC들과의 대화나 퀘스트 해결 방법을 통해 그들의 생각과 미래를 바꾸게 된다. 플레이어의 말과 행동에 따라 NPC들의 미래가 바뀌고 시장 선거의 결과도 달라지게 된다. 엔딩에서 그 동안 플레이어가 한 행동들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은 고전 걸작 '폴아웃' 1, 2편을 연상시킨다.
단순하지만 재미있는, '로보캅다운' 전투
전투는 단순하고 재미있다. 무기는 기본 권총과 샷건이 주어지는데, 샷건은 적들이 떨군 무기로 교체할 수 있다. SMG부터 AR, MG는 물론 유탄발사기, 로켓런처, 코브라 캐논(!)까지 다양한 무기를 사용해볼 수 있다.
초반에는 총기를 주워 쓰는 것이 전투에 유리한데, 기본 권총을 충분히 강화한 중후반부에는 권총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로보캅의 레벨을 올리면 주어지는 스킬 포인트로 체력, 공격력, 기술, 대화(?) 수치 등을 올릴 수 있는데, 초반에도 적들의 공격을 그냥 버텨가며 공격하는 게 가능하지만 충분히 강화한 후반부에는 그야말로 영화에나오는 로보캅의 모습 그대로, 적들의 공격을 무시하고 돌진해 처리하는 식의 전투가 가능해진다.
물론 로보캅에 버금가는 인지도의 ED-209나 코브라 캐논을 가진 적들, 로봇군단 등등과 싸울 때에는 어느 정도 엄폐와 회복이 필요하지만...
ED-209가 원작 그대로 멍청하다는 것도 유쾌한 점이었다. 원작을 잘 모른다면 'AI가 멍청하네' 같은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고증' 아니겠는가.
나의 선택이 NPC의 미래와 선거 결과까지 바꾼다
전투만 이어지는 게임이었다면, 높게 평가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대화와 퀘스트가 너무 재미있어 늦었지만 이 게임을 꼭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의 노숙자들의 대화부터 로보캅과 NPC들이 나누는 대화까지 다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세계관을 반영하고 로보캅과 NPC들의 성격을 보여주며, 대화마다 원작 특유의 블랙코미디 느낌을 살린 위트가 가득했다.
퀘스트 구성도 좋았는데, 악당들을 물리치는 것들부터 동네 할머니의 고양이를 찾아주고, 불법주차한 차량들의 딱지를 떼는 것까지 소소한 퀘스트들이 모두 재미있었다.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딱지를 뗄 것인지, 벌금을 부과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데, 매번 기자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로보캅이 로보캅이라 일반적인 사고방식과는 조금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런 점도 게임에 의외성을 더해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 아니었나 싶다.
로보캅의 스킬을 어떻게 찍었는가에 따라 대화의 선택지가 늘어나기도 하고, 어떤 선택지가 유리한지를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 초반 전투가 조금 힘들더라도 경험치를 추가로 얻을 수 있는 스킬과 대화 선택지를 늘려주는 스킬을 먼저 찍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속편이 기대되는 게임
기술에 6포인트를 투자하면 힌트를 찾아 열어야 하는 문 등을 그냥 해킹해버릴 수 있는데, 게임의 재미를 떨어뜨리니 가급적 직접 탐색해서 해결하기를 권하고 싶다. 하지만 극 후반부에 나오는 터렛 해킹에 6포인트가 필요하니 장기적으로는 6포인트를 투자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트로피 면을 보면, 꽤 쉬운 편이다. 무엇보다 난이도 관련 트로피가 없어 쉬운 난이도에서 무쌍을 찍으며 해결이 가능하다. 고양이 구출, 터렛 해킹 등 꼼꼼하게 살피고 특정 스킬에 일정 포인트를 투입해야 하는 조건이 있지만 그리 어렵진 않다.
엔딩에서 시장이 바뀌었지만 디트로이트가 평화로워지고 악당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니, 속편이 꼭 나와줬으면 좋겠다. 큰 맵이 하나 뿐이라 조금 아쉬웠는데 속편에서는 맵도 더 추가되길 바란다. 그리고 테이온이 훌륭한 게임 디자인을 보여준 만큼 다른 IP를 활용한 게임도 보고 싶어졌다.
'로보캅: 로그시티'를 하며 머리에 떠오른 게임은 '드래곤 에이지' 1편과 '폴아웃' 1, 2편이었다. 굉장히 간략화된 형태지만 그런 느낌을 주는 게임이었고, 기자의 인생게임인 '드래곤에이지' 1편과 같은 디자인의 게임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수를 매기자면 85점은 줘도 될 것 같다. 솔직히 테이온의 게임에 이런 높은 점수를 매기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70점대 게임만 만드는 게임사라는 이미지였는데, 편견을 버리고 테이온의 다음 작품은 나오면 바로 플레이해 봐야겠다.
마침 테이온에서 최신 업데이트로 뉴게임 플러스 모드를 추가하고 더 높은 난이도도 제공하고 있으니 아직 플레이하지 않은, 혹은 몰랐던 유저라면 꼭 플레이해 보기 바란다. '로보캅' 시리즈에 향수가 있다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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