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라는 말을 보면 무엇이 연상될까. 과거부터 있던 종교인들의 그것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서브컬쳐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브컬쳐를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성지순례는 감상한 애니메이션, 영화, 소설, 만화 등의 배경이 된 장소에 직접 가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적고 있는 기자 역시 '알바뛰는 마왕님!''의 성지 도쿄 세타가야나 '페이트 스테이나이트'의 성지 코베 등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
'화이트앨범2'라는 게임이 있다. 일본 아쿠아플러스(AQUAPLUS)의 걸작 연애어드벤쳐 게임으로 '시원찮은 그녀를 위한 육성방법'으로 작가로서도 이름을 알린 시나리오라이터 마루토 후미아키의 필생의 역작이다.
이 게임은 플레이스테이션3, PS Vita 버전이 일본에 출시되어 국내에도 즐긴 게이머가 많으며 역대 연애어드벤쳐 게임 중에서는 최고로 꼽는 이가 많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화이트앨범2의 배경으로는 일본, 미국, 프랑스 등이 등장하는데, 이 중 일본의 성지 이치카와역, 신주쿠, 키치죠지, 나리타 공항 등은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미국은 공항만 등장해서 굳이 찾아가는 팬이 많지 않지만 가려면 쉽게 갈 수 있다.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은 역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다. 일본에서야 성지순례를 다녀온 팬들도 있고 가이드북까지 있다지만 국내에서 화이트앨범2 성지순례를 위해 프랑스에 다녀오는 건 역시 부담이 된다. 기자도 언젠가 성지순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간직한 채 아직 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트라스부르에 화이트앨범2 성지순례를 다녀왔다는 '용자'가 나타났다. 콘솔 게임을 위주로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쳐 전반을 즐기는 자칭 '30대 오타쿠' 김규희(닉네임 Heeyachan)씨다. 어렵게 연락을 취해 프랑스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게 된 계기를 듣고 현지 사진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김규희씨를 대신해 게임포커스가 성지순례 여행을 정리해봤다.
* 본문에는 '화이트앨범2'의 후반부 내용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은 분은 게임을 플레이하신 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성지순례라는 것이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 때 그걸 왜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가끔 일본에 갈 때도 생각만 하고 굳이 나서서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게임 성지순례를, 더군다나 유럽까지 가서 성지순례를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를 움직이게 만든 화이트앨범2에 대한 '팬심'이었다. 화이트앨범2는 플레이한 유저들 대부분에게 최고의 연애어드벤쳐 게임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PS Vita 버전이 출시되어 다시 한 번 플레이 열풍이 불기도 했다. 김규희씨 역시 PS Vita에 화이트앨범2 게임팩을 장착하고 성지순례를 떠났다.
"2012년, White album 2라는 게임을 접하고 며칠간 침식을 잊고 플레이 했습니다. 원래 텍스트 게임을 잘 하는 편이긴 했지만 이정도의 몰입감은 처음이었습니다. 미려한 일러스트, 성우들의 훌륭한 연기, 감동적인 음악, 무엇보다도 마루토 후미아키가 쓴 시나리오가 대단했습니다. 걸작 게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고등학생부터 수 년에 걸쳐 펼쳐지는 세 사람의 이야기, 전작 White Album의 주제이기도 한 '삼각관계'와 그에 따른 세 사람의 감정의 방향, 주위 이야기를 매우 잘 그려냈더군요. 게임하는 내내 울고 웃고, 때로는 술과 함께, 때로는 위장약과 함께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게임 중 CC(Closing Chapter)의 대미를 장식하는 '스트라스부르'의 이벤트였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스트라스부르를 배경으로 한 이벤트는 제 눈을 앗아갔고, 그 곳의 배경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라는 것을 안 이후 스트라스부르 방문은 제 버킷 리스트 중 최상위권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일로 유럽 출장을 떠날 기회가 찾아왔다. 첫 출장은 이탈리아였고, 따로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두번째 출장지가 독일로 결정되었고 이는 성지순례를 떠나라는 계시로 받아들여졌다.
"이번에 우연히 출장지가 독일로 결정되고, 마침 주말 이틀 일정이 비어 오랜 고민 끝에 묵혀뒀던 버킷 리스트에서 스트라스부르를 꺼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정이 만만치 않더군요. 딱 오전에서 다음날 오후까지 하루 반나절이 비는 시간이었고, 숙소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는 기차 편도 4시간, 왕복 교통비 130유로(약 15만원)가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작중에서 주인공들이 묵었던 (외견의) 숙소를 예약하려고 하니 하루 160유로(약 20만원)의 고급 객실 밖에 남아있지 않더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가야죠!(이것이 오타쿠입니다) 모든 부담을 다음 달의 나에게 미루고 과감하게 결제한 후 출발했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의 배경지를 방문해 작품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기자도 경험해봤지만 흥미롭고 즐거운 경험이다. 그것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의 배경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성지순례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이제서야 다른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왜 가는지 이해가 됩니다. 주인공들이 그 장소에서 겪었던 사건, 감정. 그런 것들을 함께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비록 배경이지만 2D의 세계가 3D에 펼쳐진 것 같았고, 그것이 저를 흥분케 했습니다. 낮/밤으로 게임에 나온 장소들을 찾아다니고, 마지막으로 게임에서 주인공들이 다녔던 이동 루트를 따라 걸어보며 작중에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했을까를 상상하는 건 정말 훌륭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지순례의 취지에 맞게 작품과 관련된 장소 위주로 사진을 찍고, 관광을 했지만 전통있는 유럽 도시답게 다른 볼거리도 매우 많았습니다. 특히 노트르담 대성당은 지금까지 가 본 유럽 성당 중 최대규모의 성당이었으며 내부 역시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했습니다. 그 외에도 시대에 따라 프랑스/독일 각 국의 영토로 편입된 역사가 있는 도시인 만큼 양국의 특색이 모두 나타나는 경관, 음식, 언어 등 볼거리가 가득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 성지순례를 떠나신다면 성지순례도 좋지만 기왕 이런 좋은 도시에 온 김에 다른 볼거리, 먹거리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스트라스부르에 다녀온 김규희씨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작중 배경이 '겨울'이었는데 이번 성지순례는 봄에 다녀왔다는 점이다. 그는 겨울에 다시 한 번, 제대로 성지순례를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여름의 문턱에서 들렀기에 굉장히 좋은 날씨 속에서 관광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작품의 그 느낌을 보다 제대로 느끼고 싶으면 크리스마스에 방문해야할 것 같네요. 다음에는 작중 배경이 되었던 크리스마스에 스트라스부르를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의 평생의 목표는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화이트앨범2 CC 루트 애니메이션의 스폰서로 나서는 것이다. 그런 장대한 꿈을 갖고 있다면 성지순례를 갈 게 아니라 저금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독자도 있겠지만, 오타쿠란 미래의 장대한 꿈을 안고 현재의 행복에 최대한 집중하는 존재 아니겠는가.
* 화이트앨범2 스트라스부르 성지순례 필요경비
- 프랑스 왕복 항공권: 약 150만원
- 호텔 1박: 약 10만원(일반 객실 예약 시)
- 샤를드골 공항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TGV 왕복티켓: 150유로(약 18만원)
- 식비: 약 30~60유로(약 5~10만원)
= 계: 약 2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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